JP, 재상으로 일품… 용상감으론 카리스마 부족

'언어 마술사' 김종필 Y셔츠 민주론 등 유신 불가피성 역설 김용태, 강직한 성품에 박정희 대통령도 “김두목”이라 칭해

안영진 중도일보 前 주필

안영진 중도일보 前 주필

  • 승인 2011-10-24 14:47

신문게재 2011-10-25 12면

[안영진 전 주필의 그때 그현장] ④ 5·16 군사정변과 유신정권, 그리고 충청의 정치인

▲ 1978년 한ㆍ일의원연맹 도쿄대회 참석차 도쿄 나리타 공항에 내린 한국대표단<사진 왼쪽 네번째가 김종필>.
▲ 1978년 한ㆍ일의원연맹 도쿄대회 참석차 도쿄 나리타 공항에 내린 한국대표단<사진 왼쪽 네번째가 김종필>.

중도일보사 사시를 '정치적 중립', '지역사회개발'로 정한 것은 전적으로 설립자 이웅렬 사장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면 정치가 체질인 그가 왜 정치를 멀리하고 신문에 뛰어들어 그와 같은 주장을 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해방 직후 '여운영'과 접촉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여운영이 암살당하고 6·25전쟁 때 쫓겨 다닌 일이 있는가 하면 좌우익 간 유혈극을 목격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선대들은 '이괄의 난' 때 멸문 당하는 걸 지켜봤다는 것이다. 그래서 패거리 정치나 벼슬길에 나서는 걸 금기시하는 가훈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번은 필자가 '정치를 왜 안 하십니까?'라고 묻자 “정치란 지글지글 불타는 화독과 같은 것이라 너무 가까이 하면 화상을 입기 쉽고 너무 떨어져 있으면 동상에 걸리는 법이라서…”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 사장은 언젠가 필자에게 기회가 있으면 스위스를 가보라고 권한 일이 있었다. 그 후 유럽취재차 스위스에 머물면서 필자는 그가 한 말을 되새겨본 일이 있다. 작지만 큰 나라 스위스…. 산악 속에 자리한 소국이 세계의 중심에서 동서냉전시대에도 세계를 끌어들이는 저력에 감탄한 일이 있다. 스위스는 '옴니버스'로 '국가는 있으나 민족 없는 나라', '중앙은 보이질 않고 지방이 행세하는 그런 나라'였다. 이 사장의 '중도', '중용론'은 단순한 '완충(buffer zone)'이 아닌 '로터리(rotary)'의 기능 같은 걸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다. 양극이 평행선을 달리다가도 숨 돌릴 수 있는 그런 형상…. 회색 아닌 줏대 있는 '중용' 같은 것.

그는 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난세에는 민세(안재홍:미 군정때 민정장관) 같은 중립적(줏대 있는)인물이 필요하다고…. 오늘의 정치판은 여전히 난장판이요, 태풍권에 들어 있다는 느낌이다.

본란에선 5·16에서 유신으로 이어지는 정치권을 되돌아봤다. 하지만 한국의 정당사나 한 시대를 주도했던 인물들을 상세하게 다룰 재간이 없어 충남권 인물 중심으로 다루게 된 점은 아쉽다는 생각이다. 그것도 필자의 회견, 대담, 현장취재 내용을 들춰봤다.

프로필이란 사전적 의미에선 '인물소개', '약평(略評)'으로 나와 있지만 일본 언론에선 그것을 '요코가오(옆 얼굴·어떤 인물의 남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일면)'쯤으로 통한다. 그래서 이미지 부각, 희화형식을 취해 본 것이다. 충청출신의 몇몇 인사에 국한된 점이 아쉽다.

▲'군사정권 규탄' 윤보선=4·19를 맞아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장면과 맞섰던 구파의 총수. 쿠데타가 일어나자 “올 것이 왔구먼!”이라는 묘한 반응을 보인 장본이었다. 대통령직에서 밀려나자 군사정권을 성토하는데 앞장섰다.

대전에도 자주 내려와 “박정희는 여순 반란 때 그 중심에 서더니 이번엔 또 쿠데타를 일으킨 자로 그 정체를 알 길이 없다”면서 대구사범 동문이라는 황용주(부산 MBC사장)와는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고 그의 형제 행적도 미심쩍은 데가 많은데다 사회질서를 잡아 놓고 군에 복귀한다더니 이를 어긴 자”라고 매도했다.

아산 출신이기 때문에 충청인들은 기대를 걸었던 인물이다.

▲'언어의 마술사' 김종필=그는 '영원한 2인자'로 모택동 옆에 주은래가 있다면 박정희 옆엔 김종필(JP)이 있다고 할 만큼 박 대통령과는 순치관계에 놓여 있던 인물이다. 재상(宰相)감으로는 일품이지만 용상에 앉히기엔 카리스마에 문제가 있다는 평이 뒤따르기도 했다.

▲ 젊은 시절의 김종필
▲ 젊은 시절의 김종필
30대 젊은 나이에 한·일 국교를 타결한 그는 늘 정치의 중심에 서왔다. 차려놓은 밥상도 제 발로 걷어 차버린 위인이라지만 박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용상은 그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많았다. 전두환은 당시 청와대 생각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4성 장군이나 국방장관 정도의 꿈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JP를 찾아가 등극을 권하자 고개를 내저었다는 후문이다. JP는 5·16 때 정권을 총칼로 찬탈했다 해서 미국과 국민의 여론에 시달려온 터라 합법적인 수순을 밟고자 했던 모양이다.

다급해진 전두환이 여기서 극약처방을 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이다. 자기사람 하나 키우지 못한 나약성과 충청도에 변변한 공장 하나를 끌어오지 못한 인물이라는 비난에 “나는 출신 구보다 대한민국을 더 사랑했다”는 식으로 맞서온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타고난 '언어의 마술사'였다. 야당인사와 학생을 감금했다는 항의에 “불법감금이 아닌 질서 속에 잠정 보호”라고 둘러댄 일도 있다. 그는 추종인물 김용태, 양순직, 감달수, 이병희, 예춘호 등을 뒤로 하고 유신의 전도사로 변신을 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는 외쳐댔다. '한국적 민주주의'와 'Y셔츠 민주론'을 내세우며 유신의 불가피성을 역설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민주주의라는 원칙은 지키되 한국적 토양에 맞는 정치제도를 구축하자는 논리였다. Y셔츠가 좋다고 해서 그대로 착용할 것이 아니라 소매길이, 목둘레 등 우리 몸에 맞도록 줄여 입어야 한다고 외쳤다.

선진국들도 대통령제와 내각제, 이원집정제 등 각양각색이다. 참으로 기막힌(?) 발상이었다. 그래서 언어의 마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후 민주화시대를 맞아 국민들이 유신잔당이라 몰아세우자 “나는 유신잔당이 아니라 유신본당(本堂)”이라고 맞받아친 장본인이기도 했다.

대전지역 공천 때 반 JP라인의 길재호가 자파인 임호를 추천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화도 화젯거리였다. 중앙시장 3분의 1이 이북 피란민이니 임호가 적격이라고 하자 그럼 3분의 2가 충청인이 아닌가? 그렇다면 김용태 토박이가 적격이 아닌가? 이렇듯 임기웅변에도 능했다.

필자가 한·일 의원연맹 도쿄대회 때 취재차 수행한 일이 있다. 회의장엔 일본의 역대 총리, 경제인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는데 그때 행한 연설이 지금도 귓전을 때린다. “옛날에는 먼 나라와 손을 잡고 가까운 이웃을 쳐 둥글리는 소위 원교근공(遠交近攻)수법을 즐겨 썼지만 이제는 먼 나라와도 손잡고 가까운 이웃과는 더욱 가깝게 공존해야 한다는 소명을 안고 있습니다”라는 그의 연설에 기립박수가 터졌다.

한·일 국교가 아직 미완이라 하나 그는 30대에 뛰어난 외교솜씨를 발휘한 셈이다. 이젠 기동이 불편할 정도의 건강이라 했다. 그러니 중국의 어느 시인처럼 황혼이 아름답기는 한데(昏無限好) 나에게도 황혼이 다가왔구나(只是近昏)라는 시 구절을 읊조리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타협의 정치' 류진산=건국 초기 대한청년단을 조직,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 맞섰던 정형적인 보수적 인물이다. 윤보선, 김영삼 등과 노선을 같이 한 구파의 맹장인 그는 “정치란 투쟁이 아닌 타협”이라는 말을 즐겨 썼다. 유명한 여걸 임영신(상공장관)과 금산에서 맞붙었을 때 이야기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몰아세우자 임영신은 “때 없이 울어대는 수탉은 백숙이나 해먹자!”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 장본인이다. 그는 타협의 명수라 해서 '지모꾼' 또는 '왕사쿠라'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가 야당 당수시절 청와대에서 정치자금(큰돈)을 받았다는 풍문이 나돌 때였다. 청와대에서 “정치자금을 받는 야당이 제구실하겠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되레 역정을 냈다. “기자라는 자의 안목이 저지경이니….” 혀를 차면서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와 무슨 이야기를 하겠느냐?”며 이렇게 토를 달았다.

“지금 야당은 고사 직전이다. 국민들의 눈높이도 문제가 있지. 야당을 키울 생각은 않고 박 정권을 타도하라면서 야당에 대한 지원은 없으니. 방법이 없잖은가? 그러니 적으로부터 뜯어낸 자금을 탄알삼아 적과 싸우는 거지!” 이는 삼국지의 지략(?)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괴인' 박병배=정가에선 '괴인', '험구'라는 별명을 들어온 인물이다. 자유당 시절에는 무소속 3악당(민관식, 박병배, 최치환)의 한 사람이다. 그는 서울시경국장을 지낸 정보통으로 미 CIA 한국지부장은 이후락, FBI 서울소장은 박병배라 할 만큼 보폭이 넓었다.

거구에 걸쭉한 입담, 전형적인 충청도 사투리에 누구에게나 반말을 써온 기인이었다. 유세장에서도 “요즘 어뗘? 저것들(여당) 때문에 고생하게 되었어!”하는 식이다. 야당 극렬파를 겨냥, “몸도 아껴야지!” 박정희는 이왕 뽑았으니 건드리지 말고 그 밑엣 놈들을 족쳐야 한다는 논리다.

왕초를 건드리면 그 밑엣 놈들이 '충성심 경쟁'을 하기 때문에 삭신이 부서진다고도 했다. “현 정부 요인치고 나 박병배한테 거수경례 안 붙인 놈 있으면 나와 보라구!”이렇게 내지르기 일쑤였다. 그가 국방차관(정무) 시절 군하극상사건을 다룰 때 말대꾸하는 JP에게 “새까만 중령 놈이!”라며 뺨을 후려치며 고향을 묻자 부여라고 했다. 박 대통령과는 같은 성씨였다. 그래서 사신을 보낼 때 '족장좌하(族長座下)'라고 겉봉을 썼다.

한 번은 대통령과 독대를 하는 과정에서 스위치를 누르자 허스키 목소리가 들렸다. JP가 일본의 정객, 실업인과의 술자리에서 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테이프였다. “종필이가 저지경이니….” 대통령이 혀를 차더라는 것이다. 그는 유세장에서 정적인 임호를 향해 “만주벌판에서 일본헌병 밀정을 지낸 놈”이라 몰아세웠다. 지금 같으면 명예훼손으로 일을 그르칠 막말이지만 그 시절엔 그것이 통했다.

또 한 가지 한·일 의원연맹 도쿄대회 때 필자가 지켜본 실담이다. 호텔 커피숍에서 일본중의원 두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저녁 후쿠다(福田) 수상 비밀요정에서 거하게 한잔 내면 참을 것이고 아니면 히로히토(천황) 누이가 '막가사(맥아더의 일본발음)' 장군에게 수청을 든 내용을 까발릴 텡께” 알아서 하라고 내뱉었다.

이에 일본의원은 “아뿔싸!”하며 목덜미를 쓸어 넘긴다. 이런 험구였다. 그는 한 시대 정치판을 휩쓸고 다닌 거물이었다.

▲'박정희의 두목' 김용태=5·16주체는 모두 군인이지만 유일하게 민간인 신분으로 가담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서울대(사대)를 나와 서천에서 고교교사로 근무하던 중 5·16에 가담했다. 그는 뚝심 있는 정치인으로 당시 YS, DJ, 유진산, 이민우 등 야당 지도자를 잘 다루는 거물이었다.

유신 전까지 JP와 뜻을 같이 해오다 훗날 JP가 자민련을 창당할 때 산파역을 하고는 JP와 거리를 두었다. 그의 강직한 성품과 틀 때문에 박 대통령도 사석에선 '김두목'이라 부를 정도였다. 5·16 직후 야당의 반발과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우리는 군 본연의 위치로 복귀합니다”를 선언하던 날 밤 그는 박의장을 협박(?)했다는 설이 나돌았다.

“거사를 하자고 선동해 놓고 혼자만 살겠다고 군 복귀냐?”고 대들었던 강심장…. 그 살벌했던 장면을 상상해 본다. 그는 공화당 원내총무, 정무장관 등을 거쳤으나 옛 동지 JP의 자민련에는 불참했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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