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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여행]시간도 사람도 잊혀지는 것…빛바랜 영광 '강경'

사람의 온기 나눠받아서일까 근대건물들은 말끔했지만 물빠진 적막한 포구에는 갈곳 잃은 배만 덩그러니

우난순 교열팀장

우난순 교열팀장

  • 승인 2015-05-28 13:35

신문게재 2015-05-29 14면

[주말여행] 빛바랜 영광 '강경'

▲옥녀봉에서 바라본 강경포구.
▲옥녀봉에서 바라본 강경포구.

금요일 아침, 강경읍내는 조용하기 그지 없다. 역을 빠져나와 길 한가운데서 포구 가는 길을 몰라 두리번거리던 차, 역으로 들어가는 앳된 청년에게 물었다. 청년은 친절하게 여기저기 알려줬다. 그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선 핼러윈의 'A Tale That Wasn't Right'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래된 노랜데 아냐니까 많이 좋아한다며 상큼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꾸벅 하고 간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부드럽다. 담장을 타고 흘러내린 붉은 장미가 고혹적인 자태를 뽐낸다. 걷다보니 유난히 큰 집앞에 노인 셋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논산에 있는 병원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란다. 뒤의 큰 집은 병원 이사장집이라며 한 할머니는 그 집 내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들려줬다. 그러면서 어지럼증이 생겨서 밥맛도 없다며 '늙으면 죽어야지' 맘에도 없는 말로 마무리한다.

땡볕이 내리쬐는 강경포구는 적막했다. 금강은 도도히 흐르고 있으나 포구는 공원으로 조성돼 운동하는 사람들만 간간이 눈에 띌뿐이다. 잡초로 무성한 너른 땅이 포구였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강가에 다다르자 비릿한 냄새가 풍겨 비로소 포구였음을 짐작케했다. 그런데 물가에 손바닥만한 고기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신기해서 아주머니들에게 물었다. “우리도 몰라. 궁금하면 잡아다 사람들한테 물어봐. 깔깔.” 좀 뒤에 알았지만 숭어였다.

옥녀봉에 오르자 강경읍내와 포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침례회 국내 최초 예배지가 있어서인지 작은 읍소재지인데도 교회 첨탑이 많이 보인다. 옥녀봉에서 내려오다 보니 한 할머니가 벤치에 앉아 무릎을 주무르고 있었다. 광주에서 나들이 왔는데 다리가 아파 못올라가고 벤치에서 일행을 기다리는 중이란다. “나가 서울서 젓갈장사 했어. 아가미젓이 젤루 맛있어. 시방은 맛난 거 오만 거 넣어 파능께. 아무리 비싸도 좋은 육젓은 아버지 사다 드려야 혀.”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여름에 물에 밥말아서 양념한 새우젓을 드시며 달아난 입맛을 달래곤 하신다.

슬슬 배가 고파지는 게 시계를 보니 1시가 가까워진다. 옥녀봉 아래 삼계탕집 주인장 이귀활(75)씨는 강경 토박이로 옛날일을 훤히 알았다. 금강 하구둑이 생기기 전만 해도 포구에 조수가 드나들어 뻘이 차지 않았다고 한다. 평양, 대구와 함께 강경은 3대 시장의 하나로 온갖 해산물과 농산물이 강경을 거쳐 전국으로 유통되던 요충지였다.

“그땐 복어는 그물에 걸려나와도 버렸어. 물자가 넘치던 때였어. 각 지방사람이 다 사는 데가 강경이었지.” 시장이 활성화돼 은행도 여러 개 있었다고 했다. “강경상고 출신 은행장이 7명이나 나왔어. 강상은 지금으로 치면 서울대지. 왜정 때 일본가서 은행장도 했잖여.” 이씨는 중간중간 밥 먹고 나가는 손님들에게 삼계탕값 올려서 미안하단 말을 했다. 반주로 소주 2병 마신 젊은이 2명에겐 술 너무 먹지 말라고 타이른다.

“고깃배들이 들어오면 뱃사람들이 일주일씩 묵어 가. 색시집에 가서 술마시고 자고 흥청망청 써댔지. 술집이 20~30 군데였어. 강경이 돈이 얼마나 많이 도는지 흔한 말로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고 했어.” “강경이 젓갈이 유명한 건 그때 멸치, 새우, 황석어 같은 게 올라오면 생것을 한꺼번에 다 내보낼 수 없으니께 소금으로 버무려서 저장했어. 그래서 젓갈시장으로 유명해진 겨.” 이씨는 생각하면 그때가 꿈만 같다고 했다. 강경이 이렇게 초라해진 걸 선조들이 보면 기겁할 거라고 덧붙였다. 저만치 보이는 포구의 옛 정경이 떠오른다. 왁자지껄 팔도에서 모여든 상인들의 외침과 저잣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작부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

▲강경역사관
▲강경역사관
허기진 참이라 삼계탕의 뜨끈하고 진한 국물이 술술 잘도 넘어갔다. 뼈까지 쪽쪽 빨며 쫀득한 찹쌀죽도 다 먹어치웠다. 볼 게 아직도 많은데 두시가 훌쩍 넘었다. 한 낮의 사람이 뜸한 거리는 어딜보나 젓갈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마침 방치됐던 근대건축물을 정비하는 사업이 한창이다. 강경중앙초 강당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일제 강점기 건물로 튼튼해보였다. 강당안에선 아이들이 신나게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건물의 수명은 사람의 온기가 좌우한다더니 과연 그랬다. 옛 강경공립상업학교 관사는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멋들어진 외양의 관사는 무성한 나무들로 둘러싸여 새들의 세상이었다. 참새들이 어찌나 지저귀는지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관사 내부를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강경은 근대 건축물이 즐비하다. 미곡창고, 화교학교, 한일은행 강경지점, 노동조합 등도 있고 사라져간 건축물도 숱하다.

누군가로부터 잊혀진다는 건 서러운 일이다. 실비아 플라스는 아름답고 유망한 시인이었다. 천재시인 테드 휴즈로부터 버림받은 실비아는 가스 오븐에 서른 살의 젊디 젊은 머리를 처박고 자살했다. 강경은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는 장소다. 어쩌면 그것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강경은 애잔하다. 우리네 삶도 그러하다.

글·사진=우난순 기자


▲가는 길 대전에서 강경가는 무궁화호가 자주있고, 40분 소요.
▲먹거리 봄철 우여회가 유명. 강경은 뭐니뭐니해도 젓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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