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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11월9일:두 조국에서 버림받은 독립투사 김원봉... 1919년 의열단 조직

김은주 기자

김은주 기자

  • 승인 2016-11-08 20:00
▲ 약산 김원봉/사진=유튜브
▲ 약산 김원봉/사진=유튜브

약산 김원봉은 독립운동 역사의 기억 저편에 있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최근 영화 ‘암살’과 ‘밀정’에서 각각 배우 조승우와 이병헌이 맡은 역에서 김원봉이라는 독립투사의 자취를 엿볼 뿐이었다.

역사에서 잊힌 영웅의 모습은 그렇게 초라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의열단장에 조선의용대장, 민족혁명당 총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직 등을 맡아 독립에 헌신했다. 그의 명성은 일제가 오금을 저릴 정도였는데, 일제는 당시 백범 김구 선생보다 현상금을 더 많이 내걸고 그를 잡으려 혈안이 됐다. 김원봉의 위상이 어땠을지 가늠이 되는 부분이다.

97년 전인 1919년 11월 9일 ‘오늘’은 김원봉에 의해 의열단이 조직된 날이기도 하다.

의열단은 일제 요인 암살, 주요 기관 공격 등을 전개해 식민지 조선인의 독립정신을 이끌어내기 위해 결성됐다. 3.1 운동의 비폭력 투쟁이 일제의 총칼에 짓밟히는 것을 보고 일찌감치 폭력투쟁 노선을 정했다.

▲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성립기념 사진/사진=위키백과
▲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성립기념 사진/사진=위키백과

정의의 ‘의(義)’ 맹렬의 ‘열(烈)을 딴 의열단은 ‘공약 10조’와 ‘5파괴’, ‘7가살’이라는 행동목표를 지침으로 삼아 활동했으며, 조직원들조차 인원이 파악되지 않을 만큼 그 수가 방대했음에도 광복 때까지 단 한 명도 변절하지 않았다.

항상 죽음과 함께 살았던 그들은 하루하루를 마지막인 것처럼 살았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서 보면 ‘오늘을 마지막 날로 살았던 의열단원은 언제나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머리를 잘 손질했으며, 항상 죽기 전 마지막이라며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그리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해 자유롭게 생활했다’라고 언급했다.

조선총독부 청사 폭파, 부산경찰서 폭파 등은 ‘의열단’의 독립투쟁 전설을 만들었다. 그러나 전설적인 인물 김원봉은 해방 후에 일제 시대 때보다 더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47년에 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에게 체포돼 수모를 당하는 일이 있었다. ‘남로당이 주도한 파업에 연루됐다’라는 이유였으며 이후로도 친일파와 우익정치깡패들의 테러에 시달렸다. 게다가 자신이 따르던 여운형이 서울 혜화동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친일파 잔재들이 날치는 조국을 등지고 김원봉은 월북을 하게 됐다.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민족주의자였던 김원봉의 북한 생활 또한 녹록지 않았다. 1956년 북에서 숙청된 뒤 총살설, 자살설 등 소문만 무성한 채, 그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평생을 조국 독립만을 위해 살았던 김원봉. 남과 북 어디에서도 편안하게 잠들지 못 했던 비운의 영웅이었다./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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