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연의 산성이야기] 임진왜란 당시 권율이 주둔했던 역사의 현장

제39회 독산성(禿山城-오산시 지곶동), 죽미령전투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18-03-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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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산성 남벽 안 성 내부 모습/사진=조영연
경부선 철도와 1번국도 오산 북방 4km쯤 좌측 한신대 바로 뒷산 양산봉(180m) 남쪽 기슭에 위치했다. 독산성이 자리한 지곶동은 원래 조꼬지마을이었다. 이는 조이고지(종이고지)에서 온 것으로, 한자화 과정에서 지곶동(紙串洞)으로 바뀐 것으로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1988)은 보고 있다. 과거 이 지역에 종이를 만든 곳 즉 조지서가 있었다 한다.

독산의 서쪽은 황구지천을 중심으로 펼쳐진 넓은 평야지대이며 나머지 방향도 낮은 구릉들이 놓였긴 해도 거의 평지다. 성이 자리한 양산봉이 비록 야트막하고 경사도 완만해 보이지만 성벽에 올라서 보면 의외로 사방 60 내지 70도 가량의 급경사를 이뤄 아래로부터의 접근이 상당히 어려운 반면 산성에서는 사방의 시야가 탁 트인다. 특히 성의 우측을 통과하여 한양으로 향하는 교통로들이 모두 시계에 들어 산성으로서 아주 양호한 입지임이 분명하다.

역사적인 사건의 발생 시마다 독산성 동편과 죽미령을 통과하는 이 교통로들을 이용해서 백제군, 고구려군, 신라군, 몽고군, 왜군, 청일군 등이 그리고 최근 6.25때에는 공산군과 아군이 치열한 접전을 전개하면서 후퇴 혹은 전진을 했을 정도로 시대 불문하고 이 산성의 군사적 존재 가치는 대단히 컸다. 독산성의 임무는 바로 이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독산성은 둘레 약 1400m, 추정 높이 6~7m 가량에 4개 문지와 암문 하나가 있고 성내는 축성 후 전승기념으로 세웠다는 고려)와 삼림욕장이 차지하고 있다. 성벽은 정상에서 남쪽 기슭으로 둥그스럼하게 축조한 전형적인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동문 바로 안쪽 보적사 후면이자 성내에서 가장 고지인 세마대를 중심으로 만곡이 진 8부 정도를 지형에 따라 성벽을 에워싸 전체적으로 평면도는 울퉁불퉁한 타원형에 가깝다. 정상부에서 동북, 서, 동남으로 뻗어내린 3개의 능선 사이 골짜기 공간들에 장대지를 제외한 건물지, 우물 등 각종 시설들이 자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마대 아래 동북과 동남 능선 사이이자 현재 주출입구(보적사 정문)인 동문 바로 안쪽은 사찰 경내로 돼 있다. 수구 등이 설치된 서벽과 남벽 안쪽에 우물, 집수지, 기타 건물들이 존재했던 축대 흔적들이 남았다. 현재 치(雉) 8개소, 남문 근처에서 수구 둘과 집수지 하나, 우물 내지 추정 우물자리, 성벽 중간쯤에 조성된 네 개의 문과 서암문이 있다. 정상에는 장대지인 세마대와 주변 평평한 공터가 있다. 충분히 봉수나 군사 훈련 공간이 됐음 직하다. 고기록에는 관청 건물지와 풍부하지 못한 5개소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들 주변엔 건물지 축대들이 산재해 있다. 문은 최근 복원한 남문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죽주산성처럼 사각형에 너댓 개의 장대석으로 다리 판석처럼 걸쳐 낮은 천장으로 조성했다. 문벽 가까이 천장과 바닥에는 둥근 문주공들이 뚜렷한데 원형과 방형구멍이 병존하는 곳도 있다. 당시에 조선시대 백자, 도기, 기와류 들과 백제토기편, 통일신라기 주름무늬병 등도 출토됐다 한다. 현재도 붉은색 기와나 선조문 회색기와조각은 물론 회색토기, 유약을 발라 구운 도자기 조각들이 곳곳에 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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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산성 세마대/사진=조영연
기록상으로는 선조27(1594)년에 백성들이 쌓고 임란 후 부사 변응성이 개축한 후로도 두어 번 보수가 있었다. 따라서 현재 남은 것은 조선시대 성이지만 삼국사기 기록이나 정황상으로 미뤄 백제 무렵부터도 柵 혹은 어떤 형태로든 방어시설이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져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널리 활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전체적으로 많은 부분이 근래에 복원된 상태이나 다행히 북벽에서 서벽으로 회절되는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20 내지 30미터 가량 비교적 덜 다듬어졌지만 세월에 마모된 석재들로 축조된 부분이 남아 원래 성벽 모습을 가늠케 한다. 특히 이 부분에는 삭토 대신 기초부를 약간 앞으로 더 내어 보축한 후에 축성함으로써 성벽의 붕괴를 방지하고자 했던 흔적이 완연하다. 나머지 부분들은 대부분 너무나 말끔히 손질돼 오히려 고성의 묘미를 감소시킨다. 성내에는 이름처럼 큰 바위들이 많고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연스럽지 못하게 쪼개진 것들이 많아 성벽 축조에 관련된 것이 아닌지 여겨진다.

대체적으로 현재의 남은 성벽은 임란 후의 것이다. 정상부의 과거 평택 괴태곶으로부터 전송받는 봉수터가 있었다고 한다. 조총 방어를 위해 포차와 포대를 배치한 흔적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란 당시 권율은 호남의 군사를 이끌고 올라와 여기에 주둔 농성하면서 매복 등의 전술을 펴 최소의 피해로 적을 막았다. 그것은 호남과 서해 해로 방어를 유리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행주대첩을 용이하게 한 동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禿山의 '禿'은 대머리 혹은 민둥산의 의미를 지녀 곳곳에 존재했을 교통요지 부근 민둥산에 柵이나 城들을 세웠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인 바 이곳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여겨진다. 고구려 광개토왕이 독산성 축조 바로 직후 순행한 남쪽지방이란 409년 기사가 더욱 주목된다. 물론 이 시기는 백제가 아직 한성에 도읍이 존재했던 한강을 사이에 둔 채 대치를 한 시기이기는 하나 이미 395년 경(백제 아신왕, 고구려 광개토왕 무렵)에 關彌城()을 고구려가 차지한 상태에서 해상로를 이용 점거하고 있었다면 그 가능성도 생각해 볼 만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종합해 보면 독산성은 충분히 백제시대부터 고구려, 그 뒤 신라순으로 활용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산성을 향해 팍팍한 언덕길을 오르면서 우뚝 솟아 우러러 보이던 성벽의 위압감도 성에 올라 아래를 굽어보는 순간의 장쾌함에 단번에 스르르 녹아내린다. 푸른 하늘 아래 거침없는 성벽 위를 굽이굽이 돌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뚜렷하고 그를 바라보는 마음도 저절로 경쾌해진다. 황구지천의 물빛도 하늘을 닮았다.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조영연-산성필자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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