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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83. 가족의 힘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다

이제는 '쾌적날씨'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18-12-09 10:04
가락국수 장사를 하면서 아들을 바라지한 어머니가 있었다. 아들의 성공만을 오매불망 바라면서 온갖 고생을 한 조영기 군의 어머니가 바로 그분이었다.

하지만 경북고 출신의 아들이 서울대학교에 합격했지만 돈이 없었다. 이에 그의 어머니는 동분서주하여 친척과 이웃으로부터 돈을 꿨다. 그리곤 상경하여 서울대를 찾았지만 등록금에 모자라 그만 돌아서야만 했다.

영기 군은 "10만 원인 집 월세도 없는 터에 대학은 무슨?"이라며 낙담하곤 대학을 포기하는 대신 돈을 벌겠다고 했다. 이에 절망한 엄마는 꾼 돈을 모두 돌려주고 아들이 부산으로 떠나는 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뒤늦게 경향신문과 문화방송의 이웃돕기 금고로부터 도움을 받은 까닭에 '등록금 완료'라는 전보를 받았지만 이미 사후약방문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이 같은 내용은 [지방기자의 종군기(從軍記) - 단신 월남한 소년병, 반세기 종군기자의 이야기] (저자 윤오병 & 출간 행복에너지)의 P.244~246에 고스란히 표출되어 있다.

지난 12월 5일자 조선일보 A1면과 10면에서는 <백혈병과 3년을 싸우고 '불수능'도 뛰어넘은 소년 수능 만점자 김지명 군>이라는 보도를 냈다. 이 기사를 보면서 동병상련에 금세 눈시울이 뜨거웠다.

중학교 3년 내내 극심한 병과 싸우면서도 공부와 긍정 마인드라는 두 마리 토끼를 결코 놓지 않은 김 군에게 먼저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이어선 그의 어머니다. 남들은 그냥 먹는 과일조차 씻고 삶아서 먹였던 김 군 어머니의 평소 지극정성은 '맹모삼천지교'의 수십 배를 뛰어넘는 진정한 모정의 극치에 다름 아니었다.

뿐만 아니란 수능 당일 김 군의 귀가시간이 늦어지자 "시험 좀 못 보면 어때? 네가 이렇게 건강한데……"라며 펑펑 울었다는 부분에선 동병상련에 감동의 눈물이 줄줄 흘렀다. 필자도 자녀교육에서 경험했듯 사교육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소위 명문대에 갈 수 있다.

필자의 딸 역시 서울대를 과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렇지만 서울대 입학 당시엔 필자 또한 돈이 없었다. 주변에 도움을 청했지만 다들 모르쇠로 일관했다. 차가운 인심에 통탄하다가 하는 수 없어 숙부님을 찾았다.

서울대 합격증을 보여드리며 손을 벌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무려 500만 원이란 거금을 선뜻 주셨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설이 있긴 하되 너무나 감사해서 눈물이 펑펑 솟았다. 그 돈으로 딸의 등록금은 물론이요 밀렸던 빚의 청산에도 큰 도움이 됐음을 물론이다.

[지방기자의 종군기]는 이밖에도 지난 시절의 '역사'까지를 두루 다루고 있는 화제의 화수분이다. 예컨대 1968년에 있었던 미 해군 잠수함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P.187~189)과, 같은 해 1월 21일 무장간첩 김신조 등 30여 명의 서울 침투 사건은 남북에 훈풍이 부는 지금으로선 마치 소설 속 이야기인 양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의 저자는 6.25 한국전쟁 때 소년병으로 서부전선 고랑포 104고지 전선에 참전한 적이 실재한 기자 출신이다. 1964년 경향신문 기자로 입문 한 이후 경향신문 대구·경북취재팀장과 부산취재팀장, 경기일보 정치·경제부장 및 편집국장을 거쳐 중부일보 편집국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기자로 얼추 평생을 살아 온 윤오병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기자로서 취재해 온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편린들을 줄줄이 풀어내고 있다. 그즈음 기사와 함께 당시의 '증빙사진'까지 함께 볼 수 있다는 건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의 압권이다.

황해도 옹진군이 고향인 저자의 바람처럼 남북이 진정 평화 무드로 일관된다면 오죽이나 좋을까……라는 게 이 책을 덮으면서 와 닿은 감흥이었다.

필자는 고난과 파편의 세대랄 수 있는 베이비부머다. 그에 걸맞게(?) 찢어질 듯 가난해서 남들처럼 많이 배울 수 없었다. 설상가상 가장의 능력마저 상실하고 병약한 홀아버지를 봉양하자면 나라도 나서서 돈을 벌어야 옳았다.

역전에 나가 두들겨 맞으며 구두닦이 소년가장을 시작했다. 중학교 교복을 입고 등하교하는 또래들을 보자면 혹여 동창이라도 만날까 두려워 머리를 꿩처럼 땅바닥에 쑤셔 박았다. "임마, 구두 닦다 말고 뭐하는 겨?"

"죄송해유, 눈에 뭐가 들어가서유……." 그렇게 얼버무리며 눈물을 씻어냈다. 배운 게 없다보니 늘 비정규직과 박봉의 노동자 그룹에 속하는 변방의 그늘만을 점철하여 살아왔다. 아이들은 미루나무처럼 쑥쑥 자라는데 그처럼 옹졸하게 살아봤자 노후엔 휴.폐지나 줍다 비참하게 살 게 뻔했다.

배우자! 그래서 이 난관을 돌파하자!! 좌고우면 끝에 아이들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손을 잡고 도서관을 부지런히 출입했다. 돈이 안 들어감은 물론이요, 책을 많이 보면 되레 마일리지 적립 스타일의 부수적 프리미엄까지 있어 금상첨화였다.

그 '도서관의 힘'을 빌려 아들과 딸은 모두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쑥쑥 들어갔다. 필자 또한 20년 가까이 시민기자로 글을 쓰면서 가외의 수입을 얻었다. 그렇게 받은 원고료와 취재비로 아이들의 대학(원) 졸업까지를 견인했기에 당당하다.

3년 전 이맘때 첫 저서를 발간했다. 돈이 많이 드는 사교육의 동원 없이도 자녀를 소위 명문대에 보낸 노하우가 담긴 나름의 역작이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책이 많이 팔리지 않아 저자의 특권이랄 수 있는 인세는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주근보다 두 배 많은 야근 때 다시금 집중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 여 가까이 몰입하여 제2의 저서 발간용 '200화(話) 시리즈'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제 또 대두된 난관은 출판계약이었다.

필자가 누구처럼 유명작가가 아니다보니 출판사는 아무리 원고를 보내봤자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 출판사가 관심을 표명했다. 고료 000만 원 계약금을 받는 걸로 출판계약을 하기로 했다.

한데 중간에 메이저급 중간매개 출판사가 부도사태를 맞는 악재가 돌출했다. 그 파편이 튀는 바람에 출판계약은 졸지에 함흥차사가 되고 말았다. 안 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그 말이 꼭 맞았다.

홧술로 스스로를 달래며 제3, 제4의 저서 발간용 시리즈 집필을 시작했다. 그러한 나름 근자필성(勤者必成)의 결과가 다음 주 실로 '현명한' 모 출판사 편집국장님의 혜안에 힘입어 제2의 저서로 발간될 예정이다.

방송사의 유명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작가들의 거듭된 이른바 '인간승리' 콜(call) 출연요청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사양을 거듭했지만 출간될 저서에선 그 모든 면면이 드러날 것이다. 어제는 첫눈이 내렸다. 서설(瑞雪)답게 홍보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모 지자체에서는 최우수기자로 추천되었다며 공적조서 양식을 보내달라는 기별이 와서 기쁨이 배가되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아인슈타인이나 에디슨이 위대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발판은 곧은 가정교육을 담당한 어머니가 있어서 가능했다던가? 이에 견주어 말하자면 나의 제2의 저서 발간, 그리고 작가로서의 성공을 도모코자 하는 그 발판은 가족의 힘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시종일관 나를 믿고 성원해 준 아내와 아들, 그리고 딸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한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제완 사뭇 달리 청명하고 보기 좋은 게 미세먼지까지 증발한 '쾌적날씨'에 틀림없지 싶다. 이상은 필자의 또 다른 '지방기자의 어떤 종군기(終軍記)'였다.

홍경석 / 수필가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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