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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필톡]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우난순 기자

우난순 기자

  • 승인 2019-03-07 08:30

신문게재 2019-03-07 22면

사랑 3
'내 몸은, 발걸음은 점점 더 눈에 묻혀 가고/무언가 안되고 있다/무언가, 무언가 안 되고 있다'. 삶의 한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극지의 얼어붙은 호수를 절룩이며 가는 흰 북극곰처럼 아름답다. 왜 그랬을까.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포기했어야 했다. 나는 에고이스트다. 무책임하고 부조리한 인간이다. 살을 후비고 뼈를 갉아대는 상처를 주었다. 나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면서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은 무엇일까. 사랑의 욕망은 슬프고 징글맞고 더하여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원하는 것을 너는 갖고 있지 않다는 것, 네가 원하는 것을 나는 내줄 수 없는 불협화음. 그것이 사랑을 비극으로 만든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불가해하게도, 나는 당신 안에 있는 당신 이상의 어떤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파괴합니다." 자크 라캉은 '사랑'과 '욕망'의 서사를 이렇게 갈무리한다.

사랑은 배울 수 없다.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우리는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애착은 불안을, 불안은 의심을, 의심은 파괴를 부른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는 섣부른 질투로 인한 의심으로 파국을 맞는 사랑을 읊는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는 그 나머지를 상상에 맡기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얼마나 미워하고 의심하며 사랑이 클수록 감정의 출렁임은 거세다. 무어인 장군 오셀로는 이아고의 간계에 속아 아름답고 착한 데스데모나에 대한 의심의 파도에 휩쓸린다. '난 의심하기 전에 알아볼 것이고 의심되면 검증할 것이며 증명되면 해결책은 단 하나-.' 원래 오셀로는 고결하고 관대하며 품위있는 인격의 소유자다. 그런 오셀로가 포악한 모습으로 변해 "이년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며 울부짖는다. 결국 오셀로는 데스데모나를 성급하게 목졸라 죽여버리는 광기의 살인마가 된다.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오셀로는 악한 성정의 인간이 아니다. 나약함이 문제였다. 자신의 본성을 지탱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너무도 쉽게 무너져 버리고 마는 나약함 말이다. 사랑하는 사이라고,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고 누누이 자신감을 드러냈던 트럼프와 김정은. 그 사랑의 진실은 어디로 사라졌나. 굳게 맹세한 사랑의 믿음이 왜 깨졌는가. 신뢰가 무너진 사랑은 악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사랑의 공식만큼 권력 구도가 선명한 관계도 찾아보기 힘들다. 많은 것을 누리는 쪽이 선의를 베풀어야 했다. 꽃피는 봄이 오면 영변의 약산에 진달래꽃 만발하길 바랐는데 그 희망은 훗날의 희미한 약속으로 변질됐다. '전면적 제재 해제'와 '영변+α'. 일심동체라고 믿었건만 혼례상을 앞에 두고 서로는 동상이몽이었던 모양이다. 호언장담했던 사랑의 언사는 배신의 씁쓸함을 안겨주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적절한 방법은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했다.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매번 사랑을 명백히 실패하는가. 기술은 직관을 넘어설 수 없다. 직관은 서툴고 어리석은 인간을 지배하는 것. 그것이 사랑의 도그마다. 그래서 베니스의 흑인 용병 오셀로의 일방적인 의심과 단죄는 용서받지 못한다. 사랑의 욕망은 몽롱한 아지랑이로 신비화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살을 찢고 튀어나오는 끔찍스러운 괴물인 듯 했다. 동 트기 전에 사랑의 진혼곡을 불러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어떤 경우 행복한 결말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그 절실함이 어떤 이들을 사랑의 서사로 이끈다. 트럼프와 김정은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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