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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내일] 실업급여

김희정 시인

조훈희 기자

조훈희 기자

  • 승인 2020-03-29 11:34

신문게재 2020-03-30 23면

김희정 시인
김희정 시인
가끔 술자리에서 나를 시 쓰는 거지라고 소개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 상대방이 술값을 낸다. 내 말에 반응이 있으면 "시인은 가난하다." 가난해야 시를 쓸 수 있다고 뻔뻔히 목소리를 높인다. 솔직히 말한다면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싶지 않다. 폼까지 잡지는 않더라도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라면 몇 만원의 술값 정도는 내고 싶고, 밥값도 내고 싶다. 지갑 걱정 하지 않고도 정신적으로 가난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자신이 없다. 물질이 풍부하면 자꾸 정신이 혼미해진다고 먼저 살다 간 분들의 경험이 생각의 발목을 잡았다.

봄이 시작되었지만 공연도 전시도 콘서트 강연도 강좌도 없다. 겨우겨우 겨울을 넘겨 가는데 복병(코로나19)을 만났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기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봄이면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강연이나 강좌 계설 연락이 한둘은 있는데 원천봉쇄 됐다고 하면 맞는 말 같다. 이러다 보니 문학하는 후배들 앞에서 면이 서지 않는다. 그래도 예전에는 소주 한 잔 하겠다고 오는 친구들에게 짬짬이 받은 원고료나 강연료를 헐어 술값 조금 낼 수도 있었는데, 요즈음은 이마저도 어렵다. 생계는 여기서 말해서 무엇에 쓰겠는가. 내가 좋아서 시를 쓰고 시인입네 하며 사는데 말이다.

시 쓰는 일에 자신이 없어 필자가 갤러리를 운영하다 보니 사업자 등록을 냈다. 갤러리라고 해 보았자 1년에 4개월 이상 열어 본 적이 없다. 닫아두면 그나마 적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명색이 갤러리인데 문을 열어두는 날보다 닫아두는 날이 많다는 것은 문제라면 문제다. 주변에서 왜 전시를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문을 열지 않는 이유에 대해 구차하게 설명하는 것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그냥 게을러서 쉬고 있다고 둘러 대고 만다.



몇 주 전 문체부 주최 작은서점 프로젝트 프로그램이 끝이 났다. 7개월 동안 계룡문고에서 문학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상담하며 독자들에게 문학을 알리는 일을 했다. 그 결과로 아내에게 수십 년 만에 생활비를 내놓을 수 있었다. 1회, 2회 두 번 파견작가로 선정이 되어 14개월 잘 먹고 잘 살았다. 아내에게 받은 활동비를 내놓으면서 목소리 톤도 조금 높여보았다.

두 번이나 했으니까 이제는 다른 작가들이 참여하는 것이 순서인 것 같아 세 번째는 포기하고 강좌나 강연을 해가며 또 1년에 몇 번 문을 열지 않지만 갤러리를 좀 더 수익(대관)을 낼 수 있는 구조로 바꾸어 보며 살아야겠다고 나름 머리를 굴렸다. 이런 계획이 실행도 하지 못하고 코로나19 때문에 무너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생각 끝에 14개월 계약직으로 일을 했으니 실업급여를 받아 볼 심사로 고용보험 문을 두드렸다. 시인이 직업도 아니고 몇 개월 계약직으로 일을 했다고 세금을 축내려고 생각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용보험 센터에 전화를 한 뒤 온라인 강의를 듣고 실업급여 신청서를 제출하려고 했는데 상담을 해 주시는 분이 내 상황을 보더니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시를 하면 적자가 쌓여 1년에 몇 번 열지도 않는 갤러리가 걸림돌이 되었다. 실업급여를 받으려면 사업자 등록을 취소하던지 아니면 임시 폐업을 해야 한다는 설명을 들어야 했다. 몇 개월 실업급여를 받겠다고 갤러리 사업자를 반납할 수가 없어 그냥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시인이 무슨 직업도 아니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는데 무슨 생각이 들어 실업급여를 탈 생각을 했을까. 정작 나보다 훨씬 어려운 문화예술인들이 많을 텐데 계약직으로 서점에서 활동한 이력으로 세금을 받을 생각을 한 것에, 얼굴이 뜨거웠다. 실업급여는 나 같은 베짱이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생계를 위해 뛰는 개미들에게 주라고 만들어 진 제도인데 과욕을 부렸다는 생각에 부끄럽기까지 했다. 계절마다 계절에 빠져 지내며 이슬만 먹고 살았는데 물질에 눈독을 들였으니 당연한 쪽팔림이다. /김희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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