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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기억되는 삶, '황현 초상'

양동길 / 시인, 수필가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20-07-19 14:23
  • 수정 2020-07-19 14:25
황현초상
「황현 초상」, 채용신, 비단에 채색, 120.7×72.8cm, 보물 제1494호, 매천사
우리 생명은 시한부다. 누구나 죽는다. 당연지사지만 애도한다. 특히 자연사가 아니면 슬픔과 아픔이 배가된다. 친소관계에 따라 정도 차가 있을 뿐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충분한 준비시간이 부여되기도 하고,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생명 활동이 멈추기도 한다. 공교롭게 비슷한 시기 관심이 집중되는 두건의 장례식이 있었다. 망자에 대한 연민도 연민이지만, 더 큰 아픔은 냉혹하게 등진 망인에 대한 평가와 철저하게 갈라진 장례행렬이다.

임종체험인 '힐다잉'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인생에 있어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영정 사진을 찍고, 강의를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유언장을 작성하여 낭독한다. 이런저런 연민이야 맴돌지만 할 말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남긴들 무엇하랴. 스스로 관속에 들어가 10여 분 누워본다. 한없이 숭고해짐을 느낀다. 피아없는 화해와 용서, 사랑,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생각해 본다. 박경리 작가의 시 <옛날의 그 집> 마지막 구절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가 떠오른다. 나를 내려놓는 체험이다. 훗날 실제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만큼 절절하게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지만,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불로장생하려 3000여 명이나 되는 불로초 채취단을 해외에 파견한 진시황(秦始皇)같이 삶에 매달리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연로하신 어른들이 자신의 수의나 묏자리 준비로 설왕설래(說往說來)하는 모습을 간간이 보아왔다. 영정도 미리 준비하여 벽에 걸어둔다. 영정(影幀)은 장례에 쓰이는 죽은 사람 사진으로 만든 액자나 그림으로 그린 족자이다. 망자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나 사진을 진영(眞影)이라 부르기도 한다.



유년 시절 돌아보면, 초상화 그려주기 위해 가가호호 방문하는 사람이 있었다. 약간의 화대를 받고 초상화를 그려주는 것이다. 영정 제작이 일반화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사진 기술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해 커다랗게 출력하기가 어려웠던 탓도 있었으며, 더 이전에 있었던 초상화 제작의 유풍 탓도 있으리라.

초상화 제작은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시작된 측면이 있다. 유교의 충효 사상이나 숭현(崇賢) 사상이 제례의식과 맞물려 초상화 제작이 성행하였다. 영정으로 제작하여 사묘나 서원에 위패와 함께 봉안되었다. 회상하고 기리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찰에서도 고승의 영정을 봉안하여 그 수요가 엄청 많았다고 전한다. 처음엔 주로 성현, 사대부의 모습이 그려졌으나 점차 일반인도 영정의 주인공이 된다. 추모하기 위하여 그리다 보니, 당연히 엄숙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그려져, 우리 초상화의 특징이 되기도 한다. 초상화는 한결같이 절제된 표정과 자세로 그렸다. 거기에 기리고 싶은 주인공의 성정을 표현해낸 것이다.

초상화의 기법도 발전을 거듭한다. 그런 결과, 초상화 분야의 독보적 존재가 출현하기도 한다. 칠곡과 정산 군수를 지내기도 한 채용신(蔡龍臣, 1850 ~ 1941, 화가)도 그중 하나이다. 화가로서는 드물게 종2품관을 지내기도 했다. 사진술과 서양화 기법의 도입이랄까, 요철, 원근, 명암 등을 표현하였다. 자신만의 기법이 확고해서 그의 호를 따 '석지화법(石芝?法)'이라 따로 부르기도 한다. 「고종어진」을 비롯하여 수많은 초상화를 남기지만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황현 초상'을 꼽는다.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은 학자이자 우국지사이다. 세종 때 명재상 황희의 후손이기도 하다. 1883년 인재를 널리 구한다는 보거과(保擧科)가 있어 과거시험에 응시한다.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시관이 시골 선비라는 것을 안 다음 1등을 2등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당시는 서울 문벌가 출신이 아니면 과거에 합격하기조차 어려웠던 시절이다. 낙망한 황현은 거처를 광양에서 구례 만수동으로 옮기고 벼슬에 나가지 않는다. 수시로 천거가 있었지만, 매번 거절하고 학문에 몰두하여 많은 저서를 남긴다.

1910년 8월 고종이 한일합방을 선포하자 통분하여,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음독자살한다. 한 구절을 보면,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 무궁화 나라는 이미 사라졌구나 /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일 돌이켜보니 / 문자나 안다는 사람 인간되기 어렵구나"

초상화 화폭 뒤에 있는 제기(題記)로 미루어 1911년 작임을 알 수 있다. 사후에 제작된 것이다. 사진도 함께 전하고 있어 사진을 참고하여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은 갓을 쓰고 있으나 그림은 정자관을 쓰고 있다. 의복 또한 도포 입고 있는 사진과 달리 학창의를 입고 있으나, 얼굴 모습이나 손 모양 등은 동일하다. 그의 죽음과 같이 품위있고 의연한 모습으로 그렸다.

자화상이야 자신의 속내를 스스로 그리는 것이지만, 초상화로 그려진다면 어떻게 그려질까? 혹여, 한 사람 마음에라도 살아남는다면 어떠한 모습일까? 그대는 어떤 모습으로 추억되고 싶은가?

양동길 / 시인, 수필가

양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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