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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한의학 뿌리 깊은 대전…황자후·송시열 등 업적도

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 책임연구원 발표
'미륵원' 회덕 황자후 침구전문의 제도 신설
송시열은 8도 명의 치료법 '삼방촬요' 편찬
성주봉 대전서 충남의약조합 단체 결성

임병안 기자

임병안 기자

  • 승인 2021-09-18 11:29
  • 수정 2021-09-18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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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동구 마산동 대청호 옆에 위치한 옛 미륵원 부지. 나그네를 보호하는 여관이자 구급약을 주고 병자를 치료하는 대민구제 장소이다.  (사진=대전시 제공)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 선생이 유학의 대학자이면서 한의약 분야에서도 못지 않은 큰 업적이 있으며, 회덕 황자후는 조선산 약재를 연구해 한약물의 표준화에 기여하는 등 대전 의학자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제시됐다. 또 일제강점기 핍박을 딛고 대전에서 한방의학강습서가 발행되고 '충남의약'이란 학술잡지가 10년 가까이 발행될 정도로 한의사가 많았고, 학술적 역량도 뛰어났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최근 대전시사편찬위원회가 개최한 '대전의 의료와 위생' 세미나에서 향토대전의 전통의료와 의약문화를 소개했다.



▲회덕 황자후와 첫 복지시설 '미륵원'

안상우 책임연구원은 대전 우암 송시열 그리고 동춘당 송준길 선생이 대학자이면서 한의학을 깊이 공부하고 실천한 의사이었음을 강조하고 회덕현의 황자후, 한의단체를 결정한 성주봉 등 대전 인물들의 한의약적 업적을 설명했다.



먼저, 조선 전기의 의인 송암 황자후(1362~1440)는 회덕에 뿌리내린 가문에서 자라 벼슬길에 올라 인녕부사윤, 호조참의, 충청도관찰사, 이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다. 황자후가 선친에게서 물려받아 운영한 동구 마산동의 미륵원은 먼 길을 가는 나그네를 보호하고 숙식을 제공하는 데서 시작해 구급약을 주고 병자를 치료하는 등 대민구제활동을 했다. 실제로 미륵원은 행려자를 대상으로 한 구호활동으로 시작해 시설의 확장과 함께 사회봉사활동으로까지 확대된 대전지방 최초의 민간 사회복지기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황자후는 조선의 약재를 들고 명나라에 찾아가 비교 고찰해 한약물의 표준화를 이뤘고, 침의의 활동을 활성화해 의료제도 변화에도 기여했다. 전국에서 발생하는 역병에 대처하고 의료인력을 꾸준히 양성했으며, 진상약재나 진공품의 적합여부를 판별하고 약재수급을 관할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안상우 책임연구원은 "세종은 재위 때 조선의 의학자를 파견해 중국산 약재와 향약을 비교함으로써 한국 전통의학이 독자적으로 자리 잡도록 결정적 정책을 펼쳤는데 이때 대전 회덕의 황자후가 전의감으로써 중추적 역할을 했다"라며 "어려서부터 회덕 향리에서 미륵원 운영을 통해 체험한 실용지식과 관직에 나가 전의감의 약재관리 경력을 통해 의약사무에 대체불가능한 역량의 인물로 평가받았다"고 설명했다.

▲송시열의 극비 의서 '삼방촬요'
 

삼방촬요
우암 송시열이 8도 명의를 모아 치료법을 모아 편찬한 '삼방촬요' 북벌 전쟁에 대비한 향악의서로써 의도적으로 편찬 사실을 숨겨온 것으로 보인다.  (사진=한국한의학연구원 한의학e야기)

 

우암 송시열(1607~1689)은 효종 임금의 명을 받아 조선 8도 명의들을 소집해 경험 치료법을 모은 '삼방촬요'를 편찬하는데 이책은 북벌 전쟁에 대비한 향약의서다. 안상우 연구원은 앞서 일제강점기 의약서를 주로 출판하는 민간출판사를 찾아다니며 이 의서를 행방을 쫓았고, 마침내 출판 직전의 조선총독부 검열본을 입수해 국역본(전3책)을 발행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안 책임연구원은 "경험 치료법을 모은 책이건만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연사문헌에 출판 사실을 기록되지 않은 것은 (북벌을 위한 의약서가 있다고 알려질 경우)청나라로부터 견제와 의심을 받을 수 있어 의도적으로 편찬을 숨긴 것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우암 송시열은 주자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당대 정국을 주도했던 정치 사상가이며 예송논쟁 등 당쟁의 주역이 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안 책임연구원은 송시열의 제자들이 우암의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기록한 '우암적거기'를 통해 그가 83세라는 나이에 함경도 덕원으로부터 경상도 바닷가 장기와 거제를 거쳐 전라도 남해, 제주를 오가는 수 천리의 유배 길의 고역을 감당할 때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양생법을 실천했다고 설명했다.

또 동춘당 송준길(1606~1672) 선생이 남긴 33년분의 '동춘당일기'는 많은 분량의 의약 관련 기사가 들어 있는데 당시 사대부가의 의료실태를 살펴보면서 동춘당의 의료인식도 잘 설명되어 있다.

▲일제 핍박 딛고 충남의약조합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전통의학을 억압할 때 성주봉(1868~미상)은 대전에서 충남의약조합이라는 한의단체를 결성하고, 한방의학강습소를 열었으며, 기관지 성격의 학술지인 '충남의약'을 발행했다. 이 잡지는 충남의약조합 조합원에게 한의약 지식을 전파하고 한의학의 사회적 저변을 확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안 책임연구원은 "일제강점기 전통 한의들은 의생 신분으로 지위가 격하되고 의관으로의 기회도 박탈될 때 성주봉은 대전에서 교육과 강습으로 사멸하는 전통의학을 부흥시켰다"라며 "머지않은 시일에 대전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한방의학강습소와 의생교육, 충남의약 잡지 발행과 한의약부흥운동 등 성주봉의 활약상이 조명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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