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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바른 처신, 역관 홍순언(洪純彦)

양동길/시인, 수필가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24-05-17 00:00
신파극 <이수일과 심순애> 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듯하다. 신파극은 일본에 수용되어 우리나라에 전파, 치욕의 일제 강점기 유행한 대중 오락극이다. 당시 공연물의 주류이며, 우리 문학 및 예술작품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 극단이 자체 제작한 대표적 신파작품이 <이수일과 심순애>이다. 원작은 일재 조중환(1863~1944)의 번안 소설 <장한몽(長恨夢)>이다. 이는 일본 소설인 오자키 고요의 <금색야차(金色夜叉, 1897~1902년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가 원작이다. 그 또한 영국 작가 버사 클레이(Bertha M.Clay,1836~1884)의 <여자보다 약한(Weaker than a woman)>의 내용이 모델이다. 캐릭터와 스토리구조, 무대와 이름 등 일본 것으로 바꾸어 도용한 소설로 알려졌다. 번안 작품을 다신 번안, 3차 창작인 셈이다. 요즈음 같은 저작권법 아래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심순애가 돈 때문에 사랑을 헌신짝처럼 버렸다가, 김중배의 횡포에 잘못을 깨닫고 이수일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아~ OO하지 아니한가?" "OOO했던 것이었던 것이다" 등 억지, 과잉감동 부추기기로 감성팔이가 특징이어서, '신파쪼'라는 말도 생겼다. 변사의 말투, 연기 대사가 인상적이었을까? "순애야,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렇게도 좋더란 말이냐?"란 대사, 바짓가랑이 붙들고 늘어지는 순애에게 "노~아라(놓아라)"에 다양한 첨언을 붙여 하는 연기, 발로 차는 장면도 단골이다. 각종 무대예술, 오락물에 지금도 종종 등장한다.



'홍도야 우지마라'로 더 잘 알려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도 인구에 많이 회자되는 작품이다. 임선규(林善圭, 1912~?, 논산 출신 극작가)가 1936년 발표했고, 무대에 올려졌다. 일약 인기작가로 만든 엄청난 히트작이다.

조실부모한 가난한 남매가 있다. 여동생은 오빠 학비를 대기위해 기생이 된다. 어쩌다 오빠 동창생과 사랑에 빠진다. 명문가였던 애인의 집에서 반대하는 결혼이 어렵게 성사되나, 박대 받고 쫓겨난다. 남편마저 홍도를 부정한 여인으로 몰아 내치고 다른 여인과 결혼하려하자, 분노한 홍도가 그 여인을 살해한다. 순사가 된 그의 오빠에게 붙잡혀 간다는 기구한 운명을 그린 것이다.

가벼운 화류비련(花柳悲戀)의 멜로드라마 같지만, 봉건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 여성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시대변화가 담겨있다. 이상과 야망은 크지만 현실은 시궁창인 시대상이 담겨있다. 사랑과 신의, 돈, 어느 가치가 중요한지 반문하고 있다. 진로가 많지 않던 시절, 피치 못 할 사정으로 창기가 된 여인을 구출해 내는 내용이 많다. 보는 사람에겐 측은지심이 우러났으며, 순정과 의리, 협객이 되기를 자처하기도 했다.

그러한 모델이 조선시대에 있었다. 역관 홍순언(洪純彦, 1530 ~ 1598)이다. 역관은 현대의 직업 외교관에 해당한다. 통역은 물론 실무적 상호 조정과 절충이 업무이다. 허경진 저 <조선의 중인들> 등 여러 자료를 취합 요약하면, 한번은 홍순언이 북경으로 가는 길에 통주에 이르렀다. 밤에 청루에서 놀게 되었는데, 군계일학처럼 자태가 빼어난 여인이 있었다. 놀아보자고 청하였는데, 여자가 흰 옷을 입고 있었다. 까닭을 물은 즉, "첩의 부모는 본래 절강 사람인데, 북경에서 벼슬하다 불행히 염병에 걸려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나그네 길이라 관(棺)이 여관집에 있지만, 첩 한 몸뿐이라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낼 돈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제 몸을 팔게 되었습니다." 하며 목메어 흐느꼈다. 불쌍히 여겨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털어 구해 주었으나, 여인은 가까이 하지 않았다. 여인이 감사하며 간절히 요청하여, 성이 '홍'이라는 것만 가르쳐 준다. 그 여인은 훗날 예부시랑 석성(石星)의 후처가 된다.

중국 명나라 사서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성계가 친원파 권신 이인임(李仁任, ?~1388)의 후사(後嗣)로 4왕(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을 시해했다고 잘 못 기록되어 있었으나 오랫동안 바로잡지 못했다. 왕가의 세계를 바로 잡는 것을 종계변무(宗系辨誣)라 하는데, 열다섯 차례 사신을 보냈으나 모두 허사였다. 선조는 몹시 노했으며, 치욕으로 생각하고 서둘러 고치려하였다. 1584년 황정욱(黃廷彧, 1532 ~ 1607, 조선 문신)과 함께 홍순언이 파견된다. 일행을 크게 환대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석성 부부였다. 은혜에 보답하려 사신이 올 때마다 홍역관을 찾았던 것이다. 방문 사유를 말하자 석성이 앞장서 노력한 결과, 한 달여 머무는 동안 조선이 원하는 대로 해결되었다. 돌아올 때 석성의 부인이 손수 짠 비단 백 필을 자개상자 열개에 각각 열 필씩 담아 주었다. 비단의 끝에는 모두 '보은(報恩)'이라는 글자가 수놓아 있었다. 종계변무의 해결 공로로 홍순언은 2등 당릉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왕궁을 지키는 종2품 우림위장(羽林衛將)까지 승진했다.

확인되지 않으나, 임진왜란 발발시 명나라에 원군 요청을 간 것도 홍순언이었다. 야담이 전하길, 마침 병부상서가 되어있던 석성의 지원으로 이여송 부대가 파견되고, 홍순언은 통역관으로 직접 전투에도 참여했다한다.

바른 처신 하나, 의협심 발휘가 나라를 구한다. 지고지순(至高至順)한 참 사랑의 힘이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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