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 월요논단

[월요논단] 표류 중인 여성의 자기결정권

최영민 대전평화여성회 공동대표

송익준 기자

송익준 기자

  • 승인 2024-06-16 09:23

신문게재 2024-06-17 18면

최영민 대표
최영민 대표
우리는 두 공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한 곳은 첨단 디지털 휴대폰을 들고 과학과 공학의 합리와 이성의 세계에서, 또 다른 한 곳은 모든 것을 감정과 비합리성으로 작동하는 적대적인 세계다. 특히 정치적 논쟁의 장으로 들어가면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모든 논쟁은 찬성과 반대, 허용과 금지로 대립할 뿐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삶의 중요한 입법과제들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거부되거나, 시한을 넘겨 사라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의 몫으로 돌아오고 있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 낙태죄 위헌 결정 이후 5년이 지났음에도 낙태죄 비범죄화 이후 후속 입법과 안전한 임신중지에 관한 정책 논의의 부재,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했음에도 유산유도제 승인 지연으로 온전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낙태죄 폐지는 단지 임신중단의 비범죄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의 판단은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며, 국가의 허가가 아니라 여성의 권리로 보장받아야 한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권리가 권리로 작동하도록 국가가 노력해야 함에도 인구감소로 인한 인구증가 정책 실효성 여부를 떠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양방향에서 인구증가를 위한 각종 지원 소식만 들리고, 안전하고 건강한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후속 입법은 공백 상태다. 애초에 태아의 생명과 태아의 생명권에 대한 개념인식의 오류, 비교대상이 아닌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비교하는 논리적 모순은 태아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도덕적 믿음과 혼용되면서 아직도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표류 중이다.



자본의 관점에서 노동생산력과 소비구매력 감소에 대응하는 다양한 정책 필요를 무용하다고 볼 순 없으나 정부가 인구소멸이라는 불안감으로 여성의 임신유지와 중단에 대한 자기결정권의 포괄적 접근을 지연시켜선 안 된다.

여성단체와 보건의료단체, 의료전문가들도 유산유도제 도입과 필수의약품 지정, 임신중지 비용의 건강보험화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5년이 되도록 유산유도제조차 도입하지 않는 건 심각한 여성인권 침해다. 가장 안전한 임신중단 방법으로 알려진 '미프진' 수입 판매를 추진한 현대약품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자진 허가신청을 취하했고, 이를 방임한 식품의약처가 책임이 크다.

임신중지가 대부분 비급여로 이루어지고 있고, 대부분 고액의 비용 부담과 부정확한 정보와 불법적인 경로로 임신중지를 시도하다가 건강을 위협받거나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고,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원하지 않는 출산으로 영아 유기 사건까지 발생하고 있는 현실을 정부가 더 묵과해선 안 된다.

6월 3일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정부의 제9차 정기보고서를 심의하고 이에 대한 최종견해를 발표했다.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협약에 가입한 당사국 협약 이행을 감독하기 위해 이행 여부를 점검하고 평가하는데, 한국은 1984년 12월 협약에 가입한 후 이번 심의까지 총 9차례 심의를 받았다. 위원회의 한국에 대한 주요 권고 사항에는 성평등 정책을 총괄하는 여성가족부 폐지 계획 철회 및 부처 강화와 함께 여러 사안을 권고했는데 이 중에 안전한 임신중지 및 관련 서비스에 관한 포괄적인 정책체계 도입과 건강보험 적용 등도 적시되었다.

안전하고 건강한 임신 유지와 임신 중단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왜 여성의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은 국가 인구정책 앞에서 왜소해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임신과 출산을 통제하는 주체는 개인이지 국가가 아니다. 임신 유지와 중단에 대한 권리는 인간의 기본권이다. 조속히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답보상태에 있는 안전한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후속 입법을 제정해야 할 것이다.

/최영민 대전평화여성회 공동대표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 기사 모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