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장국밥은 조선시대부터 우시장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1978년 향토 음식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으며, 3년 이상 묵은 간장으로 맛을 내는 독특한 조리법이 특징입니다. 서울의 장국밥이 일찍 사라진 것과 달리 공주에서는 198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했으나, 현재는 원형이 변질되거나 사라져 가는 아쉬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에 필자는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공주 장국밥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고유의 맛을 재현함으로써 지역의 소중한 식문화 유산을 복원하고자 합니다.
![]() |
| 이학식당 국밥./사진=김영복연구가 |
그 순간 어렸을 적 잠시 우시장 중매인이셨던 외당숙을 만나러 쇠전다리(일명 : 제세당 다리) 옆 우시장에 들러 시장 옆 뚝방 밑 허름한 가게[假家] 나무의자에 앉아 먹던 따뜻한'장국밥'한 그릇이 생각난다.
1982년 11월9일 자 「경향신문」을 보면'1938년 5일 장이 남북한 합쳐 전국에 1324개소로 늘어났는데, 이 가운데 우시장으로 유명했던 곳은 경기의 수원, 강원의 춘천, 충북의 청주, 충남의 공주, 전북의 남원, 전남의 광주, 경북의 김천, 경남의 밀양, 등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갑순은 이미 1918년 시가지 정비 때 작은사거리에서 큰 사거리에 이르는 제민천변 미나리깡 옆 장국밥집 등이 늘어선 곳을 매립하여 200여 개에 달하는 사설 점포를 개설했다.
그리고 1938년 8월20일 공주읍은 읍회의를 열고 현 시장(市場) 북편과 우시장 쪽으로 시장을 확장 이전을 결정한다. 이로 인해 본정통(현 중동과 반죽동 일부) 사람들은 반대할 것이라는 「동아일보」 기사가 보인다.
결국 우시장은 제세당 다리 옆 미나깡 까지 밀려 오게 되고 결국 제세당 다리는 '쇠전다리'로 불리게 된다.
필자는 고등학교 1학년 까지만 공주에서 지내고 주로 서울과 경남에서 지냈기 때문에 그 이후 공주의 변화는 잘 모르지만 60년대의 공주시장(公州市場)은 제세당다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북쪽에 우시장(牛市場)이었으며, 우시장부터 금강 뚝 까지는 당시도 미나리깡이었다.
시장(市場)과 우시장(牛市場) 부근에 공터가 있어 서커스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일보」1926.04.16. 석간2면 사회면'충남공주본뎡(공주본정(公州本町))일륙칠번디에서 "장국밥'장사하는 뎡도형(정도형(鄭道亨)"'이라는 기사가 눈에 띄는데, 이처럼 공주의 '장국밥'은 공주의 본정(本町)과 대통다리에서 쇠전다리까지 확장되어 우시장 주변 뚝방 등에 자리 잡은 공주 외식의 중심 먹거리였다.
필자는 공주에 가면 옛 맛을 찾아 어디 '장국밥'을 하는 집이 없을까 하고 수소문해도 '이학식당'외에 특별히 '장국밥'하는 집을 찾을 수가 없다.
객지 생활을 하며 고향을 찾을 때 가끔 들러 보던 이학식당이지만 세월의 변화와 함께 맛도 변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예전의 '장국밥'과는 다른 맛 같다. 그러나 공주의 유일한 노포(老鋪)인 것만은 틀림없다.
「지역 N 문화」자료에 의하면 '충청남도 공주시 중동의 이학식당은 1950년 고(故) 고봉덕 할머니가 오일장이 서던 제민천(濟民川)의 대통교(大通橋) 인근에서 '고봉덕이 국밥집'으로 시작한 음식점이다. 한국전쟁으로 휴업하였다가 1954년부터 '이학식당'이라는 간판을 걸고 영업을 재개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학식당의 국밥은 '장국밥'이 아니라 '따로국밥'즉 밥 따로 국 따로 나오는 반갱(飯羹) 형태의 음식이지 국에 밥을 말아 나오는 국밥[湯飯]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부터 80년 대 까지 이어 온 공주의 '장국밥'과는 다른 형태의 국밥인 것이다.
1978년 4월25일 「조선일보」서울교대 박재규 학장이 쓴 '문화재(文化財)지정 받는 향토(鄕土)음식 ⑤ 공주(公州) 장국밥'이라는 기사를 보자
'인심 좋고 물 맑아 장국 일품이고 반찬은 미나리 무침과 깍두기'라 했다.
여기 기사의 그 전문을 소개하면
"금강(錦江). 그 강을 따라 굽이돌아 가면 공산성(公山城) 남서쪽 기슭에 응기종기 낡은기와집 초가집들이 소곤대듯 모여 산다.
![]() |
| 공주산성시장./사진=김영복연구가 |
여기서 '공주 장국밥'에 대한 중요한 내용이 눈에 띈다.
![]() |
| 이학식당 국밥./사진=김영복연구가 |
이를 뒷받침할 만한 기사로 1987년「경향신문(京鄕新聞)」에 "무교탕반에서는.....특별히 간장을 소중히 여겼다. 요즘은 국 끓이는데, 간장은 빛깔만 내고 소금으로 간을 하는 것이 유행이지만 탕반에는 소금은 절대 쓰지 않고 말간장(국간장)만 썼다. 그렇기 때문에 장국이 거의 빛이 없는 것처럼 말갛다."라고 썼다. 이 대목으로 당시 많은 사람들이 국밥[湯飯]을 장국밥[醬湯飯]이라고 하는 연유가 된다.
이렇듯 장국밥[醬湯飯]은 소금이 아닌 간장과 된장을 넣었기 때문에 장국밥[醬湯飯]이라 했던 것이다.
특히 그리고 사실 여부는 확인해 봐야겠지만 공주 '장국밥'이 전주비빔밥 그리고 평양냉면 등과 함께 1978년에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으로 부터 우리 고유의 향토(鄕土)음식이 문화재(文化財)로 지정되어 보호받게 됐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장국밥'은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을까?
장국밥의 시작은 국밥[湯飯]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국밥[湯飯]은 『동문선(東文選)』조선 전기의 문신 유순(柳洵, 1441~1517)의 십삼산도중(十三山途中)'이라는 시에 등장한다.
"我要索湯飯(아요색탕반)내가 국밥을 사먹으려고,
聊以停吾車( 료이정오거)애오라지 수레를 멈추고"라는 내용이 나오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39년(1763) 4월 23일을 보면 어사(御使) 홍양한(洪亮漢)이 국밥[湯飯]을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유만공柳晩恭(1793∼1869)이 조선 후기인 1843년 문인으로, 노량진 무속 풍경을 담아 편찬한 한시『세시풍요(歲時風謠)』에"局湯坊當路權(면국탕방당로권)냉면집·탕반집 길가에서 권력을 잡고 있으니 爭登人似勢門前(쟁등인사세문전)다투어 들어가려는 사람들 세도가의 문전 같네"라고 읊었다.
이후 조선 말인 1883년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사옹원(司饔院) 분원공소(分院貢所)에서 도자기 만드는 일을 했던 공인(貢人) 하재荷齋 지규식池圭植(1851~?)의 일기인『하재일기菏齋日記』에 보면 자주 한양 성내에 들어가 도자기도 납품하고 수금도 하면서 국밥[湯飯]을 사 먹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후 19세기 말의 조리서『규곤요람(閨壼要覽)』에는 "장국밥은 국수 마는 그것과 같이하는데 밥만 마는 것이다. 밥 위에다 기름진 고기를 장에 조려서 그 장물을 붓는다"라고 했다.
서울의'무교탕반'에 관해 소설가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1901~1981)는 "장국밥은 양지머리만을 삶아 맛이 좋은데 젖퉁이고기를 넣어 주고, 갖가지 양념으로 고명한 산적을 뜨끈뜨끈하게 구워서 넣어 주어 유통과 산적이 잘 어울려서 천하진미였다"라고 찬탄했다.
1933년「매일신보(每日新報」학예부(현재의 문화부) 기자를 지낸 대한민국의 영문학자, 기자, 문학가 겸 수필가 아능(雅能) 조용만(趙容萬, 1909년~1995년)은 1930년대의 문화계를 되돌아보는 글에서 "그때 무교탕반은 값이 30전이었다. 설렁탕이나 냉면, 비빔밥이 다 10전이었는데 무교탕반만 그 세 곱절이었다. 그렇게 받을 만한 것이 맛이 달랐다. 국물이 뽀얗게 진하고 비싼 움파를 곁들인 고기산적을 넣고 국수를 알맞게 넣어 맛이 별미였다."라고 회상했다.
그런데 서울의 무교탕반은 많은 문화 인사들이 그 집의 '장국밥'맛을 회고했지만 1930년 대 무교탕반집과 함께 장국밥은 사라졌다.
이에 대해 의학박사인 신태범(愼兌範 1912∼2001년)은 "장국밥은 … 값은 30전으로 비쌌으며 양지머리·차돌박이 편육과 고기산적이 웃기로 화려하게 먹었다"면서 "그러나 193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폐문했고, 1940년대는 아무도 쇠고기를 구할 수 없어서 이런 국밥집들이 없어졌다"고 그 소멸을 증언했다.
많은 문헌 자료를 볼 때 '장국밥'은 조선시대부터 서울과 공주 지역에서 즐겨 먹었던 음식이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해방 전 이미 '장국밥'이 사라졌지만 공주에서는 1980년대 까지 향토음식으로 그 명맥을 이어 오면서 공주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온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공주의 장국밥도 이미 사라졌고, 장국밥에 대한 스토리도 왜곡된 부분이 많다.
식생활문화를 연구하는 필자가 2000년도에 사라진 진주냉면을 자료를 바탕으로 재현해 냈던 것처럼 공주의 '장국밥'도 원형에 가깝게 재현해 냄과 동시에 왜곡된 스토리도 바로 잡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