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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보기] 각자도생의 시대

변호사 정연헌

이현제 기자

이현제 기자

  • 승인 2026-10-22 17:49

신문게재 2026-10-23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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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헌 변호사
한동안 생수를 사 먹는 사람들을 보며 낯설어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도 사 먹는데, 조금 지나면 공기도 사 마시는 세상이 오겠네'라며 혀를 차곤 했다.

수돗물의 신뢰성이 떨어지고 계층 간 위화감을 줄인다는 이유로 국가가 막아섰던 생수 판매는 1994년 대법원의 무효 판결 이후 우리 일상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이제는 편의점에서 자연스럽게 생수병을 집어 드는 스스로를 보며 세상의 변화를 실감한다. 국가가 담당해야 할 깨끗한 물의 공급이 어느새 민간 시장의 영역으로 넘어간 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사회적 안전망이 민간으로 이전된 것은 물뿐만이 아니다. 가정집이나 점포, 건물에 붙어 있는 사설 보안업체의 스티커가 익숙해진 지도 오래다. 예전에는 경찰이 전담하던 치안과 시설 보호 업무를, 이제는 개인이 비용을 지불하고 사설 보안업체에 맡긴다. 부유층이나 금은방 같은 특수 시설은 물론 일반 가정집까지 스스로 비용을 내고 안전을 '구매'하는 시대가 됐다.

더욱 심각한 변화는 사법과 피해 구제의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과거 변호사의 주된 업무는 피의자나 피고인의 인권을 옹호하고 변호하는 것이었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다소 거칠고 중구난방으로 진술하더라도, 숙련된 수사관이 이를 정교하게 정리해 가해자를 수사하고 처벌했다. 피해자는 국가 수사기관이 쌓아 올린 엄밀한 수사 기록을 바탕으로 민사소송을 제기해 피해를 구제받을 수도 있었다. 국가가 정의 실현의 주체로서 기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던 구조였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고소대리'가 변호사의 주된 업무 중 하나가 되었다. 국가 수사기관이 알아서 피해를 입증해 주길 기대하기 어려워지면서 개인이 상당한 비용을 들여 변호사를 선임해야만 비로소 수사의 물꼬가 트이고 피해 구제의 기회가 열리는 시대가 된 것이다.

최근 수사권 조정과 검찰 수사권 폐지 등 형사사법 체계의 격변 속에서 이러한 현상은 한층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사회적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일반 국민의 고소 사건에서 수사기관이 적극적으로 증거를 수집해 주기를 기대하기란 더욱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증거 수집을 위해 형사고소를 먼저 진행했다면, 이제는 거꾸로 민사소송을 제기해 법원의 문서송부촉탁이나 사실조회 등을 통해 어렵게 증거를 확보한 뒤 그 증거를 들고 형사고소를 하러 가는 기이한 풍경이 빈번하게 연출되고 있다.

앞으로 형사사건에서조차 경찰이 하던 증거 수집 업무를 개인이 사설 탐정을 고용해 해결해야 하는 날이 오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결국 유능한 변호사와 탐정을 고용할 능력이 있는 이들만 피해를 구제받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피해를 보고도 억울함을 삼켜야 하는 구조로 흘러갈지 모른다.



먹는 물의 사유화에서 시작해 치안의 민영화, 그리고 사법적 피해 구제의 민영화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지금 국가가 책임지던 공공서비스의 기본 영역들이 해체되고 개인이 모든 위험과 비용을 짊어지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 한가운데 서 있다.

국가가 제공하는 최소한의 안전망과 법적 보호조차 개인의 능력과 자본에 의존하게 되는 현실은 씁쓸하다. 그러나 당장 시스템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면, 이제 우리 스스로가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타인이나 국가 시스템이 나를 온전히 지켜줄 것이라는 천진한 기대는 접어둬야 할 때다.

범죄와 피해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주의를 기울이고, 어떠한 거래나 관계에서도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법적·실무적 방어책을 정교하게 세워야 한다. 철저한 자기 책임 아래 안전과 권리를 지켜내야 하는 사회. 이것이 생수 한 병을 집어 들며 깨달아야 하는 이 시대의 서글픈 초상이자 우리가 직면한 냉혹한 현실이다./정연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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