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를 헌신적으로 섬기며 어려운 이웃의 구제 활동에 힘쓰고 목회활동의 본을 보여온 김석인 기독교연합봉사회 이사장(한신교회 담임목사)이 중도일보와 인터뷰에서 강조한 말이다.
겸손함과 선한 기질이 몸에 밴 김석인 이사장을 만나 기독교연합봉사회 이사장으로서의 활동 이야기와 48년간 목회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평생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헌신하며 참 목회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김석인 이사장은 이 시대가 원하는 목회자상을 그대로 삶으로 실천해온 주인공이다.
서구 탄방동에 위치한 한신교회에서 김석인 이사장과 나눈 70 평생 인생 이야기는 큰 울림과 감동으로 다가왔다.
-김 이사장님은 지난해부터 기독교연합봉사회 이사장님을 맡아 활동해오고 있으신데요. 기독교연합봉사회에 대해 소개해주실까요?
▲제가 지난해에 제43대 기독교연합회장에 취임했는데요.
기독교연합봉사회는 1949년 미국의 안두화 선교사님(에드워드 아담스)이 한국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설립하셨습니다. 우리나라는 봉건주의 사상에 의한 쇄국정책 때문에 복음 전파가 안 돼 있었죠. 그래서 미국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면서 봉사의 씨앗을 뿌리게 되었습니다. 안두화 선교사님은 기독교 농민학교를 세우고, 농촌지도자들을 양성하는 과정을 통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1952년 6월 재단이 설립됐고, 초대 이사장을 안두화 선교사님이 맡아주셨습니다.
기독교연합봉사회 이사장은 구세군, 예장통합, 감리교,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에서 번갈아가며 2년씩 맡고 있습니다. 네 개 기관은 기독교연합회가 출범할 당시 공동 출연기관입니다.
저는 지난해 취임식 때 우리 기독교연합봉사회 정신을 이어받아 사회와 이웃에 봉사하는 정신을 계속 이어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돕는 일에 우선한다고 했죠.
결손가정 아이들 40여 명을 돌보고 있는 서구 정림동 후생학원을 비롯해 월평동의 한밭종합사회복지관, 월드컵경기장 내에 위치한 대전어린이회관, 장애인 복지기관인 서구 가수원동의 행복한우리복지관, 용두어린이집, 부사어린이집 등을 운영하고 있지요.
기독교연합봉사회는 저희가 맡은 위 기관들을 잘 보살피고 있고, 부정기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섬기는 일들도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영혼 구원과 이웃사랑입니다. 교회의 사회를 향한 선행은 당연한 일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상 명령이기도 합니다. 대전한신교회는 개척 초기부터 현재까지 교회 표어를 ‘환경과 생명을 살리는 교회, 치유와 회복이 있는 교회, 성도가 행복한 교회’로 정하고 이웃사랑 실천을 위해 성도의 헌금으로 예배당 건축하는 일보다 나눔과 봉사와 섬김의 일에 교인이 한마음으로 앞장서 30여년을 봉사해왔습니다.
시각장애인 복지시설 에벤에셀에서 7년간 50~60명에게 매월 점심 봉사하고, 연 1회 국회의사당과 청와대 등을 동반해 방문하는 봉사활동을 해왔습니다. 또 효심정, 효성의집, 작은자의집, 필그림복지원 등을 각 신도회별로 담당해 무료급식봉사하고 목욕봉사 활동을 했습니다.
월드비전 도시락 봉사도 여신도회에서 꾸준히 하고 있고, 국내외 지진이나 수해 현장 봉사에도 앞장섰습니다. 후원금도 지급하고 있지요. 강원도 수해 지역 현장 봉사와 태안 기름유출 제거 봉사참여도 앞장섰고, 이란 지진 돕기 성금을 대사관에 전달하고, 고려인 돕기 의류수집 전달도 했습니다.
네팔과 라오스 선교사를 후원하고, 염소와 망고나무 보내기 성금 지원도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환경운동 차원에서 매년 봄가을로 보문산, 수통골, 계족산 환경정화활동에 전 교인이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다.
매월 넷째 주마다 15년째 교회 주변 청소를 하고 있고, 현재는 교회 부근 남선공원 환경청소도 남녀 신도회에서 하고 있습니다. 인재 양성을 위한 장학금 기탁은 물론 장애인 복지시설과 외국인복지관 등 복지 시설과 시민사회단체도 후원하고 있습니다. 대전 시내 택시 종사자 돕기를 위한 택시 타고 교회 오기를 대전 최초로 실시하고, 개인택시 자녀 5명, 법인택시 자녀 5명을 선정해 500만 원 장학금도 함께 지급했습니다. 각종 문화공연과 외래 강사 초청 교양강좌를 실시하기도 했지요.
대전경찰청 창립 시 위문 방문, 둔산경찰서 전의경 체육대회 치킨 후원은 물론 코로나 초창기에 서구청에 코로나극복 후원금을 지급하는 등 지역사회와도 좋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부활절을 맞아 전 교인이 헌혈에 참여했고, 매년 추수감사 헌금 전액을 월드비전, 사랑의 열매, 서구청, 봉사체험교실 등에 이웃사랑 기금으로 기부했습니다.
둔산 고속버스 승강장에 대형 벽시계를 기증했고, 샘머리공원 약수터를 비롯해 대전 시내 약수터에 물바가지를 제공하면서 시민 편의시설 후원도 했습니다.
다양한 공익 캠페인에도 적극 참여해 산불예방 캠페인을 벌이고, 지역상품 애용하기와 지역신문보기를 연중 실시하고 있답니다.
장기기증운동 참여와 전교인 심폐소생술 교육도 하였지요. 청소년 수화 전국경연대회에 나가 우승까지 했답니다.
매년 청소년부 바자회 수익금 전액으로 연탄을 구입해 연탄 봉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매년 12월 서구청 앞 보라매공원 트리 장식 후원도 참여합니다. 규모가 크지 않은 교회가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에 재정을 사용하는 일이 쉽지 않은데 장로님들과 온 성도님들이 한마음으로 목회자의 목회관을 이해하고 함께 해 주셨기에 가능했던 아름다운 발자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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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이사장님, 70 평생을 살아오시기까지의 삶의 여정에 대해 들려주실까요?
▲저는 1954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아버님은 불신자셨고 기독교를 박해하시던 분이라 교회에 다니시던 어머님을 많이 핍박하셨지요. 일본 징용병으로 끌려가셨가다 돌아오시고 수년 후 저를 낳으셨습니다. 농촌의 가난한 농사꾼 아들로 태어난 저는 어머니가 위암 수술로 위의 3분의 2 이상을 잘라내시면서 사경을 헤매며 거의 돌아가시기 직전에 예수를 영접해야 천국 간다는 친척의 말에 부축을 받으며 교회에 나가시게 되었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나셨습니다. 그 이후로 아버님도 장로님이 되셨고, 어머님은 권사님이 되셨고, 8남매가 모두 믿음 생활을 하게 돼 큰 형님과 큰 누님도 장로님이 되셨고, 저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서천군 마산면 마산초와 한산중학교를 마친 후 선린상고(현재 서울 선린정보고)를 졸업하고 한신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제가 신학교 들어가겠다고 하자 부모님이 아주 완강하게 반대하는 목회자의 길을 간다며 부모 자식 연을 끊자고 하셨습니다. 너무나 힘든 목사님들의 삶을 지켜봐 오셨기 때문에 그렇게 결사적으로 반대하셨던 거죠. 저는 암사동에서 혼자 자취하며 너무 못 먹으니 마르고 영양 상태 불량이었죠. 서울 근교 기도원에서 폐결핵 환자를 며칠 동안 돌보게 되었는데 전염이 되었는지 저도 각혈로 쓰러졌습니다. 신길동 성애의원에서 응급조치를 받고 국립의료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퇴원 후 죽기 전에 목회 한번 해보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어 목회할 교회를 찾던 중에 제주도 모슬포 교회 모갑경 목사님의 배려로 제주도에 가게 되었죠. 그런데 조건이 있었습니다. 제주도 교회는 여신도들이 많아 총각은 안된다고 약혼이라도 하고 오라는 겁니다. 그래서 신풍감리교회 구본수 목사님을 찾아 뵙고 사람을 소개시켜 달라고 했더니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감신대 여학생을 소개시켜 주셔서 만났습니다. 첫 번째 만났을 때는 차마 제가 폐병 환자라는 말을 못했고, 두 번째 만났을 때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학생은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더군요. 8일째 되던 날 그 여학생으로부터 만나자고 연락이 왔는데요. 지금도 잊혀지지 않네요. 남영동 송아지 다방에서 그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대학노트 앞 뒤로 빽빽히 넉 장 분량의 편지를 써왔더군요. 눈물로 다 젖은 편지였습니다. 가족 이야기도 쓰고, 신학생이 된 이야기도 쓰고, 그리고 제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안 했으면 헤어졌을 건데 아프다는 얘기를 듣고는 헤어지자는 말을 못하겠다고...병자라고 버린 거냐고 그럴까 봐서...그래서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한 후에 결혼하자...결혼해서 고쳐드리자...그렇게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그런 편지였어요. 그 여학생 아버지가 종로 원제한의원, 강원한의원 원장을 맡으셨던 유명한 한의사셨죠.
가난한 농사꾼 아들에다가, 아직도 폐결핵 치료 중인 전도사에게 애지중지 키워 온 귀여운 딸이 시집을 가겠다고 하니 그 부모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그 모든 이야기를 어찌 종이 몇 장으로 다 쓰겠습니까. 아무튼 결혼을 하게 되었고 논산 새샘교회로 부임하여 14년 동안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개척의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커다란 개천 두 개가 만나는 곳에서 교회 개척하는 환상을 보고 대전에 와서 개척을 하게 된 거지요.
1991년 5월5일 두 평 짜리 방에서 처음 개척교회를 시작했는데요. 이후 서울한신교회 이중표 목사님의 도움과 가족 친지들의 도움으로 92평의 전세 건물에서 목회를 하게 됐습니다. 논산에서 목회할 때,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고생을 해서 그런지 예배당 강대상, 피아노, 의자 하나 하나를 만지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때 굳게 다짐했죠. ‘대전에 가서 교회를 하게 되면 땅 사고 건물 짓고 하기보다는 나누고 베풀고 살자. 그게 남는거다’라고요. 그래서 막상 저희 교회는 전세 살면서 많이 나누면서 어려운 교회를 섬겨 왔습니다. 내후년 2025년 3월 만 70세에 정년을 맞아 은퇴하기 전까지 교회 부채를 다 갚고 헌당 예배를 드리는 게 가장 큰 소망이고 바람입니다.
-이사장님의 목회관은 무엇인지 말씀해주실까요?
▲'하늘을 품자, 사람을 사랑하자'입니다. 제 목회 소망이자 목회철학이기도 한데요. 하늘을 보면 맑게 갠 날도 있고 먹구름 낀 날도 있지요. 하늘처럼 사람도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는데 다 품고 목회를 하자는 의미입니다. 48년째 목회자로 살아왔는데 저의 목회관은 더 많은 성도 수와 더 많은 재정 규모가 아니라 하늘을 품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 열심히 나누고 베풀고 사랑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이사장님은 교인들과 가족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있으시다지요?
▲제가 아팠던 후유증으로 인해 건강 문제 때문에 교회와 교인들을 더 열심히 섬겨드리지 못한 것이 항상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또 제 아내와 제 큰 아들도 저에게서 결핵이 전염이 되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 점을 생각만 하면 미안하고 눈물이 납니다. 지금도 가끔 집사람과 그런 얘기를 합니다. 큰 아들이 어릴 때 우유를 사달라고 하는데도 돈이 없어서 못 사줬던 게 끝내 가슴에 못이 박혀 남아 있습니다. 학원을 보내달라는데도 못 보내줬고 미안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감사하게도 아들들이 잘 자라줬습니다.
-이사장님, 요즘 사회는 '묻지마살인'이 횡행하고,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들이 너무 많아 길거리를 다니는 것조차 무서운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교권은 추락했고, 세상이 말세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흉흉한 세상이 되어버렸네요. 원인이 뭐라고 보시나요?
▲이유는 가치관의 타락이라고 봅니다.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도덕과 배려가 사라지고, 무엇이 소중한지 분간을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 위주, 개인주의 같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정신 구조가 들풀처럼 번져가는 것 같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내가 왜 엄마 말을 따라야 돼?'라고 반문하는 이런 현상들도 가치관의 타락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존중, 공경, 도덕, 효도’를 중시하는 가치관이 흔들리지 않고 든든히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간혹 가다 마음을 아프게 한 교인들도 있었지만 '내가 더 사랑하면 되지'라고 생각하고 더 사랑하고 감싸주려 노력했습니다. 사람을 미워하면 내 마음이 더 괴로워지니까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내 마음이 편하려고 기도하면서 미움을 다 덮어버리려고 노력했죠. 그러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더군요. 상대방이 변화되어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이 편해야 되는 거니까요. 그 사람이 날 힘들게 하고 괴롭혀도 용서를 못하면 내가 더 괴로워지니까 뒤에서 험담하고 욕하는 소리를 들어서 속상하고 마음이 아프더라도 마음을 편안히 다스리기 위해 노력해왔죠.
신약성경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엔 두려움이 없나니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면 자꾸 두렵고 불안해지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성경 말씀 중에 신약성경 빌립보서 4장 6절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감사함으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는 말씀을 제가 제일 좋아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찬송가는 563장 '예수 사랑하심은'입니다.
-이사장님, 앞으로의 계획을 들려주실까요?
▲7순을 맞아 뒤돌아보니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네요. 그래도 한신교회를 개척한 것이 제 평생 가장 잘한 일로 생각이 됩니다. 한신교회에서는 지역사회와 함께 하기 위해 여러 봉사활동도 많이 했는데요. 전 교인 대중교통 이용해 교회 오기, 교회 주변 환경 보호하기, 사랑의열매, 월드비전과 어린이재단 등을 통해 후원금을 전달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성심성의껏 도와온 일 역시 큰 보람입니다. 교회가 마땅히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 저변의 어려운 환경에 있는 분들을 위한 기구를 만들 것을 생각 중입니다. 몇몇 분들과 교감을 한 내용입니다. 임기 마치기 전 구체적인 논의를 할 생각입니다. 우리나라는 물론 아프리카 등의 기구 설립을 지속적이고 효과적으로 할 생각입니다. 재원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목회 마무리를 잘 하는 게 목표입니다. 지난해에 태어난 너무나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손주들과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대담, 정리 한성일 편집위원(국장) hansung007@
▲1954년 충남 서천 출생. 서천군 마산면 마산초, 한산중학교, 서울 선린정보고, 총신대, 한신대 신학과, 한남대 신학과 대학원 신학석사. 상담학 공부, 건양대에서 선교치유학 공부.
논산 새샘교회 담임목사 역임. 한국기독교장로회 부흥선교단 단장 역임. 대전광역노회 증경노회장, 한국기독교장로회 헌법위원 고시위원, 대전시기독교연합회 자문위원, 대전성시화운동본부 공동회장, CTS대전방송 목회자 이사, 대전 한신교회 담임목사, 기독교연합회 제43대 이사장으로 활동 중.
대전시장 표창, 경찰의 날 경찰청장 감사장, 바르게살기 봉사훈장, 경실련 사회정의상, 대전광역시 장애인단체 표장, 월드비전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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