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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한 아들과의 재회… 아버지는 포옹으로 용서를

[백영주의 명화살롱]14.렘브란트 반 레인 ‘다윗왕과 압살롬의 화해’

백영주·갤러리 봄 관장

백영주·갤러리 봄 관장

  • 승인 2014-04-09 15:00
▲ <다윗 왕과 압살롬의 화해>, 렘브란트, 16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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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 왕과 압살롬의 화해>, 렘브란트, 1642년



다윗의 첫째 아들 암논, 이복동생인 ‘다말’을 범하고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는 암논을 살해 후 내쫓기는데…

2년만의 피난생활을 하고 재회한 다윗과 압살롬
작가는 명암의 대조로 부자의 화해장면을 극적으로 표현



‘용서’와 ‘화해’. 말하긴 쉽지만 막상 실천하기는 어려운 것들 중 하나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헤어지길 반복한다. 서로 말하는 중에 오해가 생긴다거나, 가치관의 이유 등으로 수많은 다툼을 겪기도 한다. 먼저 ‘화해’를 구하는 것도, 그를 ‘용서’하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쉽지 않기에 더욱 아름다운 과정이다.

렘브란트의 <다윗왕과 압살롬의 화해>에는 성서 속 용서와 화해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예루살렘 왕 다윗의 첫째 아들인 암논은 이복동생인 다말에게 반해 상사병에 걸렸고, 결국 꾀를 부려 다말을 강제로 범했다. 결혼으로 책임졌어야 하지만 자기 욕망을 채운 암논은 다말을 내쫓았다. 이 사실을 안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은 복수할 기회를 노리다 암논을 살해했다. 이로써 그는 누이의 원한을 풀었을 뿐 아니라 차기 왕권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를 제거한 셈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크게 노했다. 암논은 그가 특별히 사랑하던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를 생각하며 통곡했다. 그래서 압살롬은 왕궁을 떠나 외가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에도 2년 동안이나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신하 요압을 재촉해서 그의 중재로 다윗과 압살롬은 만났고, 다윗은 압살롬에게 키스를 하는 것으로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 렘브란트는 이 장면을 특유의 명암을 강조해 그려냈다.

렘브란트 작품 중에서는 특이하게도 오리엔트 풍의 터번과 화려한 의상을 두른 다윗 왕과 역시 화려한 옷을 입은 압살롬이 그림에서 단연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으며, 의상에 달린 보석의 번쩍이는 질감을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렘브란트는 배경을 어둡게 함으로써 인물들을 돋보이게 만들었고, 이 명암은 부자(父子)가 재회하는 장면의 극적인 효과를 높였다.



▲ <돌아온 탕아>, 렘브란트, 16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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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온 탕아>, 렘브란트, 1669년

성서 이야기를 토대로한 렘브란트의 또다른 작품 ‘돌아온 탕아’
아들을 감싸안은 손을 주목… 한손은 아버지, 한손은 어머니로 예수의 사랑 표현



<돌아온 탕아>도 성서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렘브란트의 그림으로, 나눠주었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볼품없는 꼴로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따뜻하게 맞아준다. 머리도 박박 깎이고 누더기만 걸친 아들을 감싸 안는 왼손은 투박한 아버지의 손, 오른손은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이며 예수의 사랑을 나타내기라도 하는 듯 아버지는 후광을 받아 빛난다.

하지만 큰아들을 죽인 일에 대한 분노가 아직 지워지지 않았던 걸까? 다윗은 아들에게 마음의 벽을 완전히 허물지 못했다. 그림 속 표정조차도 자애롭기보다는 허무함에 가깝다. 압살롬은 아버지의 마음이 자신에게 완전히 열리지 않은 것을 느꼈고 자신이 왕위를 잇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란을 일으켜 오랫동안 아버지와 대립하다 죽임을 당했다.

자식을 끝내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에 응어리를 가지고 있던 다윗은 결국 압살롬을 반역자의 길로 몰아가고 말았다. 다윗이 만일 암논이 다말을 강간했을 때 맏아들이라도 사사로운 정을 단호히 극복하고 확실히 징계를 했다면 압살롬의 반역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신의 사랑을 받으며 한 나라의 왕이 된 다윗에게도 완전한 용서는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백영주·갤러리 봄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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