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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토크]“당신을 봅니다…”

최충식 문화토크

최충식 논설실장

최충식 논설실장

  • 승인 2014-08-29 14:31

신문게재 2014-09-01 17면

▲최충식 논설실장
▲최충식 논설실장
TV에도 나왔던 이야기다. 셋 중 어느 우주선이 앞일까요? 서양인은 맨 위 작은 비행체를 앞쪽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관찰자' 시선에서는 멀리 떨어진 사물이 앞이다. '대상' 중심인 우리는 주로 큰 비행체 쪽을 앞쪽이라 할 확률이 많다. 보는 방향, 생각하는 입장의 차이인 것이다.

관점뿐 아니라 시선 접촉도 문화권별로 상이하다. 우리는 똑바로 쳐다보면 불쾌하다 하지만 유럽이나 아랍권은 똑바로 안 봐주면 무시당한다고 느낀다. 그런데 '시선 관리'만은 동서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엿보기와 드러내기가 문명화된 양상을 띠는 거리[街]에 나서 보자.

그런 공간, 특히 여름날의 거리는 '시선의 전투'가 뜨거운 무대다. 그 전투를 전국 450만개 CCTV로 감시한다고 눈 질끈 감을 수는 없고, 이럴 때는 쫄깃한 '토플리스 사회학'의 창시자 장 클로드 코프만이 존경스럽다. 중립의 눈으로 '다른 대상을 향하는 듯' 보는 기술, 덧붙이자면 누구처럼 '공연음란' 같은 길거리 성범죄는 절대 짓지 말아야 한다.

다른 관점에서 존경하는 직업군은 화가다. 외설도 예술로 만드는 화가는 '보지 않는 듯 보는 것'과 구별되는 기술자들이다. 외부와 내면 모두 응시한다. 이동훈미술상에 빛나는 박돈 화백은 “눈으로 보는 촉감” 표현을 썼다. 어린 시각 장애우들이 찍은 사진에서 본 것은 보다 깊은 마음의 눈, 자신과 마주하는 심안이었다. 귀로 보고(들어보고) 코로 보고(맡아보고) 입으로 보고(맛보고) 손으로 보고(만져보고) 가슴으로 보는(느껴보는) '손끝의 기적'이었다.

이 아이들은 관세음처럼 세상[世]의 소리[音]를 보고[觀] 있는지도 모른다. 영어 '보다(see)'는 '알다, 이해하다, 지켜보다, 발견하다, 상상하다, 만나다, 마음에 그리다'로 다변화한다. '아바타'라는 영화에서는 “당신을 봅니다(I see you)”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였다. “내 눈에 들어왔어. 뜻밖의 모습들이. 너에겐 안 보이겠지만.” 드라마 몰아보기로 본 '조선 총잡이'에서 최혜원(전혜빈 분)이 던진 애처롭고 애틋한 고백이 알알하다.

이렇게 붓방아로, 입으로 떠는 천 마디 궁상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라. 그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동자부처(瞳子-)', '눈부처'이니, 살아서 부처 되는 유일한 길이 이것이다. 매일 출근길, 어머니가 먼 나라로 떠나시기 전에 심어놓으신 베고니아에서 어머니 모습을 본다. 보는 것, 시각이 감각의 윗등급에 앉은 이유를 제대로 알 것 같다.

보는 것에 감정까지 섞이면 눈맞추고, 눈이 맞고, 눈떠 가고, 눈에 나기도 한다. 눈은 또 귀와 함께 언론에 부여된 사명의 상징이다. 그렇게 쓴 역사가 길다. 16세기 학자 기대승은 제왕의 눈과 귀가 언로를 향해 맑게 열려야 한다고 했다. 중도일보는 눈에 쏙 들어오는 신문, 이해미 기자가 구성한 저 비행체 그림과 다르게 '앞뒤' 분명한 언론이 될 것이다.

눈을 더 밝힐 것이다. 그러려면 아바타 나비족처럼 눈, 마음, 교감으로 보고 또 사랑해야 한다. 아이 씨 유(I see you). 당신을 봅니다. 1951년 창간 때도, 1988년 복간 때도, 창간 63주년 이 아침에도 되뇐다. “눈이 될 것입니다.” “눈과 귀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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