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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6월20일:김영삼, 보듬기에는 너무 먼 박근혜?

1969년 초산(질산) 피습 사건

김은주 기자

김은주 기자

  • 승인 2016-06-19 20:00
▲ 김영삼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가 초산테러를 당한 승용차를 둘러보는 모습/사진=연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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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가 초산테러를 당한 승용차를 둘러보는 모습/사진=연합db


2006년 5월 31일은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계절의 여왕 5월의 선거 전쟁은 불을 뿜고 있었다.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이후 박근혜)의 전국을 누비는 지원유세가 이어졌었고, 20일은 경기 군포와 인천 지원유세를 마치고 신촌에서 열리는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유세장을 찾았다. 지원유세를 벌이던 중 괴한이 휘두른 흉기에 얼굴이 10cm 가량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다.

즉시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돼 60바늘의 꿰매는 수술을 받고 입원하게 됐다. 정치권을 비롯해 병문안이 이어졌고, 이 가운데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후 김영삼)도 이례적으로 방문해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위로의 말 중 ‘뼈 있는 일침’ 한마디가 박근혜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나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초산테러 등 테러를 많이 받은 사람이라 이번 일에 큰 충격을 받았다”라고 한 것이다.

▲ 괴한이 던진 초산병에 맞아 차체 일부가 얼룩졌다./사진= 동아일보 1969년 6월 21일자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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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한이 던진 초산병에 맞아 차체 일부가 얼룩졌다./사진= 동아일보 1969년 6월 21일자 캡쳐

김영삼이 초산(질산) 테러를 당한 것은 47년 전인 1969년 6월 20일 ‘오늘’ 이었다. 당시 김영삼은 신민당 원내총무였고,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에 맞서 ‘3선 개헌’을 반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날 김영삼은 자신의 승용차를 이용해 상도동 집으로 귀가하고 있었다. 자택 근처 골목길에 이르렀을 때, 작업복 차림의 청년 두 명이 골목길을 막고 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에 차는 더 이상 가지 못한 채 섰고, 그러던 중 또 다른 청년이 차 문을 열려고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평소 김영삼은 문을 잠그는 습관이 있었고, 당시도 굳게 닫혀 있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김영삼은 운전사에게 차를 빨리 출발시키라 했고, 가속 페달을 밟아 급히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승용차를 향해 괴한들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창문을 향해 던졌다.

범행 조사 과정에서 차에 던진 것은 초산이었고, 차량 도색이 녹아내렸는가 하면 범행 현장의 아스팔트도 녹아내렸다고 한다.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이 배후가 박정희 정권에게도 향했다. 그때 김영삼이 그 물건에 맞았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다시 쓰였을 것이다.

이후로도 계속된 박정희 정권의 탄압은 김영삼에게는 깊은 감정의 골이 생겼을 터다. 생존 당시 평소에도 독설을 뱉던 김영삼은 병문안에서조차 뒤끝을 내비쳤으니 말이다. 김영삼에게 박근혜는 보듬기에는 너무 먼 그대가 아니었을까./김은주 기자

*초산은 질산의 일본어식 이름이다. 위 글은 당시 언론보도에서 사용된 용어를 그대로 사용해 초산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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