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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란의 세상읽기] 로또를 산다

황미란 기자

황미란 기자

  • 승인 2020-01-16 09:10
  • 수정 2020-01-21 09:52

신문게재 2020-01-16 22면

황미란 칼럼사진
1, 15, 17, 23, 25, 41…

눈 또랑또랑 뜨고, 볼펜 곧추세워 동그라미 그려보지만 소득이 시원찮다. 아이고! 이번에도 틀렸다. 한주동안 부자 꿈 키워주고 효험 좋은 부적처럼 든든하게 나를 지켜줬지만, 이 놈의 소임은 여기까지다. 지갑 한가운데 대장인 것 마냥 호기롭게 자리 잡고 있던 놈이 괘씸하다. 놈의 몸체를 두 손으로 힘껏 구겨 투호놀이라도 하듯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그것마저 빗나갔다. 허망하게도 나를 빗겨간 893번째 행운, 9명의 이웃에게 각각 23억 원의 부를 안겨줬다.

치열하고 팍팍한 삶 탓일까.



로또복권이 잘 나간다. 지난해 상반기에 팔려나간 금액만 2조원. 사상최고 판매액을 기록한 2018년보다 8.6%가 더 많다고 한다. 국민 한 명당 평균 8장을 구입한 셈. 혹시 찾아올지도 모를 길 잃은 행운에 현금 4만 1199원을 아낌없이 베팅한 것이다. '814만 5060분의 1'이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당첨확률이라도 움켜쥐고 싶은 마음 고스란히 담겼으리라. 대표적 불황형 상품인 로또복권의 선전이 결코 달갑지 않다.

미친 집값 때문일까.

로또 판이 된 아파트 분양시장. 작은 거실에 방 한 칸 딸린 서울 강남의 39㎡짜리 아파트 5가구를 모집하는데 다자녀 가구 133가구가 몰렸다고 한다. 전용면적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다섯 명 넘는 식구가 '고시원 살이' 감내해야 함에도 앞다퉈 일생에 한번 뿐인 '특별공급' 기회에 베팅한 것. 경쟁률 26대 1. 당첨만으로 최소 5억원 이상 시세차익이 보장된다고 하니, 팔자에 없는 셋째 아이를 가진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닌 듯 싶다.

18번의 정부 규제를 두드려 맞고도 두더지 잡기 놀이마냥 이쪽 저쪽서 튀어 오른다. 빚내서 집 사라던 전직 장관의 얘기가 몇 년 앞을 내다본 예언이 됐다. "너네 집은 얼마야?" "우리집은 이번에 ○○원이나 올랐대" 열 살 안팎 꼬맹이들의 대화가 낯설지 않은 현실. 불과 몇 달 새 수억 원의 불로소득을 맛본 이들 앞에 한푼 두푼 모은 적금통장을 보며 뿌듯해하던 김 과장의 성실함은 조롱거리가 돼버렸다.

"오늘이 가장 싸다", "더 늦기 전에…" 세상 돌아가는 일, 돈 돌아가는 일에 무던했던 이들도 투자인지 투기인지 모를 대열에 합류했다. 부동산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2030 청년들까지 호기롭게 갭투자의 길에 들어선다. 하지만 '부모 찬스' 없는 이들에게는 이마저도 녹록치 않은 법, 얼마 못가 수중에 총알이 없음을 한탄한다.

요지경 세상, 집 가진 사람도 속 시끄럽긴 매 한가지다. 평생 노력해 '내 집 한 채' 마련했건만 난데없는 세금폭탄이라니…. 나랏일 하는 윗분들의 설익은 정책이 곱게 보일 리 만무하다. 끝 모를 불황에 지치고, 굳게 믿었던 정부 정책에 발등 찍힌 서민들은 오늘도 마법에 걸려 든 것처럼 복권방으로, 또 청약시장으로 뛰어든다.

딱 91일 남았다.

또 하나의 로또 판. 당첨(?)만 된다면 한해 1억 5176만 원씩 따박따박 손에 들어오고 사무실과 차량 유지비는 물론 수족처럼 거느릴 보좌진 9명의 인건비까지 별도 제공된다. 연봉 총액으로만 보면 세계 10위 수준이고, 1인당 국민소득으로 비교하면 세계 5위 안에 드는 혜택. 동물국회, 식물국회, 난장판 국회라는 별칭을 얻은 것 치고는 너무 과분하다. 할 말 많다. 억울하다고 항변해도 소용없다. 팍팍한 생활에도 세금내기 마다하지 않았던 국민들에 대한 배신. '일하지 않는 국회'에 대한 분노 앞에 '금배지'는 허락받지 않은 특권이자, 그냥 로또다. 폴더인사 필요 없다. 이력 잔뜩 적힌 명함도 사양한다. 정말 선택받고 싶다면 지금부터라도 일 하시라.

편집 2국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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