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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이산가족이 풀지 못한 한 어찌합니까" 선우훈씨 사모곡 75년

선우훈씨 피난 후 전쟁으로 이산가족 운명
북녘에 어머니와 여동생 찾아 75년 노력
"실향민 애환 공감하는 문화 줄어 안타까워"

임병안 기자

임병안 기자

  • 승인 2022-01-25 16:54

신문게재 2022-01-26 10면

선우훈씨
실향민 선우훈씨가 22일 지정석 이북도민 대전시연합회장 자택에서 중도일보와 만나 이산가족으로 산 75년을 돌아봤다.
"고향을 떠난 지 75년, 어머니는 어떻게 나이드셨을까. 고향은 얼마나 변했을까 그립지 않을 수 있겠소."

디아스포라(Diaspora), 고향을 떠나 흩어진 사람들을 의미한다. 한민족에게도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아직 아물지 않은 채 남아 있는데 광복 직후 정치적 혼란과 한국전쟁으로 가족 그리고 고향과 생이별한 실향민이 그들이다.

중도일보가 지난 22일 만난 선우훈(90) 씨도 1946년 남한에 온 가족이 정착할 곳을 마련하려고 평안북도 정주군의 고향을 잠시 떠난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이산가족 운명을 맞았다. 선우 씨는 "숙청이라 해서 정치적 사상이 맞지 않은 사람을 강제로 쫓고 재산도 몰수하는 상황에서 남한으로 피난을 와야 했다"라며 "남한에 정착할 곳을 마련해 모든 가족을 모은다는 게 그대로 전쟁이 터지면서 생이별을 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선우 씨는 북녘에 어머니(최수향 씨)와 여동생(선우영화 씨) 그리고 작은아버지를 두고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작은아버지와 함께 남한에 먼저 정착했다. 경기도 동두천 수용소에서 잠시 생활한 뒤 경북 풍귀에서 화전을 일구며 기반을 닦던 중 6·25전쟁을 맞았다.

선우 씨는 "화전을 일구며 감자도 심고 남은 가족들이 모이는 날만 기다렸는데 그대로 전쟁에 쫓겨 경북 김해까지 피난을 가야했고, 이후로 북녘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라고 한탄했다.

더 속상한 것은 어머니의 손위 이모를 전쟁 직후 남한에서 만났는데 함께 내려가자는 제안에 어머니는 "아들이 곧 찾으러 올 텐데 길이 엇갈려 못 만나면 어떻게 하냐"며 집을 지켰다는 것이다.

선우 씨는 "그때 어머니가 이모님과 함께 피난하셨다면 지금처럼 어머니 손을 평생 못 잡는 일은 없었을텐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선우 씨는 1983년 이산가족 찾기나 대한적십자를 통해서도 어머니와 여동생을 찾는 일을 멈추지 않았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고, 월남한 가족이 있는 주민들을 타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는 풍문만 들을 수 있었다.

남한에 남은 선우 씨는 아버지와 함께 공주에 정착해 영명학교를 다니며 틈틈이 카메라 기술을 배워 가족을 일궜다. 어디를 가도 "이북네, 이북놈"이라는 멸시를 견뎌야 했고, 한때는 신고를 당해 무고한 조사를 받아야 했다. 북한에서 쓰던 이름 선우순을 선우훈으로 바꾼 이유도 차별을 견디기 위해서다. 그는 이제 아이들을 모두 키우고 아내와 편안히 지내고 있지만,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하다. 특히, 명절이면 이산가족이나 남북통일을 이야기하던 문화도 차츰 사그라들어 이제는 언급도 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

선우훈 씨는 "실향민 1세대는 거의 남아있지 않고 고향과 북녘 가족을 그리워하며 한을 풀지 못한 이들이 많다는 것을 우리사회는 잊은 것 같다"라며 "남북관계와 별개로 이산가족과 실향민에 대한 관심 그리고 민족에 대한 고민은 멈춰서는 안 된다"라고 당부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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