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조재완 한국원자력연구원 경제성분석실 선임연구원 |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드라마 '오징어 게임 시즌2'에서 주인공 성기훈이 외치는 대사다. 죽음의 게임에 다시 참가한 그가 이 말을 뱉는 순간, 공포에 질려 있던 참가자들의 눈빛은 달라진다. '경험'보다 강력한 무기는 없기 때문이다. 처음 겪는 공포 앞에서는 얼어붙지만, 성공해 본 경험은 몸이 기억하는 감각이 돼 생존 확률을 비약적으로 높인다.
지금 전 세계는 '탈탄소'라는 거대한 게임을 벌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한 협력 게임 같지만, 실상은 먼저 탈탄소 장벽을 세워 상대를 압박하는 치열한 생존 경쟁이다. 대한민국에게 이 게임의 난이도는 '최상'이다. 탄소 배출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선진국들과 달리, 우리는 여전히 제조업 중심의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수력·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자원이 풍부하지도 않고, 삼면이 바다인 데다 북쪽이 막혀 있어 전력을 수입할 수도 없는 고립된 '에너지 섬'이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우리 정부는 2035 NDC(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와 2050 탄소중립이라는 도전적인 목표를 던졌다.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산업계는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잊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 게임의 '공략집'을 이미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가장 화려하게 클리어해 본 경험이 있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1970년대 프랑스로 시선을 돌려보자. 오일쇼크로 국가 존립이 흔들리자 프랑스는 '메스메르 계획'(Messmer Plan)을 발동했다. "석유는 없지만 아이디어는 있다"는 슬로건 아래 불과 15년 만에 원전 56기를 쏟아내어 8%였던 원전 비중이 80%까지 늘었다. 에너지 안보를 위한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오늘날 서방 세계에서 가장 낮은 탄소 배출 전력망을 갖춘 국가가 됐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원전이 좋다/나쁘다"는 식의 단순 구호가 아니다. 프랑스 사례가 보여주는 핵심은 '표준화-연속 건설-정책 일관성-금융' 패키지가 갖춰질 때, 국가의 전력 믹스는 생각보다 빠르게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기적을 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1980년대에 재현했다. 바로 우리다. 전력의 90%를 석유에 의존하던 나라가 1978년 고리 1호기를 시작으로 영광, 울진, 월성에 원전을 잇따라 건설했다.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전력 수요가 급증했지만, 우리는 화석연료에만 의존하지 않고 10년 만에 전력의 50%를 원전으로 공급하는 신화를 썼다. 우리가 지금 힘겹게 가려는 녹색성장의 길을, 이미 한 번 걸어본 적이 있다는 말이다.
물론 과거엔 석탄 발전도 함께 늘어 탄소 배출 총량 자체를 줄이진 못했다. 하지만 과학적 관점에서 탈탄소의 핵심 지표는 총량이 아니라 '전력 단위당 온실가스 배출량'이다. 여기서 과학의 냉정한 숫자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는 전기의 생산부터 폐기까지 전 과정(LCA)을 고려한 탄소 배출량을 제시한다. 에어컨을 1시간 돌리는 전력량인 1kWh를 만들 때, 석탄은 무려 820g의 이산화탄소를 내뿜는다. 천연가스는 490g이다. 반면 태양광은 41g, 원자력은 불과 12g이다.
흔히 메탄이나 아산화질소 등 다양한 온실가스를 우려하지만, 과학자들에게는 이 복잡한 가스들을 통일하는 '기축통화'가 있다. 바로 이산화탄소다. 마치 전 세계 화폐를 달러로 환산하듯, 과학자들은 각 온실가스에 '지구온난화지수(GWP)'라는 환율을 적용해 '이산화탄소 환산량'이라는 단일 화폐로 치환해 계산한다. 이 계산서를 받아들면 답은 명확하다. 일각에선 원자력(12g)과 태양광(41g)의 수치 차이를 두고 논쟁하지만, 이는 동전 몇 닢 수준의 실랑이일 뿐이다. 진짜 우리가 잡아야 할 '고액권'은 820g짜리 석탄이다. 수백 그램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 급선무지, 10g대의 무탄소 전원끼리 싸우며 시간을 허비할 여유가 없다.
지금의 기술로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탈탄소화할 수 있는 분야는 전력이다. 오래된 석탄(석유) 발전소부터 차츰 원전으로 대체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과거에 성공했던 필승 전략이다. 원전 건설이 오래 걸린다는 주장도 있지만, 2050년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24년이다. 프랑스와 우리가 과거에 보여준 속도라면 수십 기를 짓고도 남을 충분한 시간이다. 우리는 이미 맨주먹으로 에너지 자립과 경제 성장을 동시에 이뤄낸 경험이 있다. 탈탄소라는 두 번째 게임, 겁먹을 필요 없다. 우리 몸은 그 성공의 감각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조재완 한국원자력연구원 경제성분석실 선임연구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