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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흥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파운드리사업단 책임연구원·사무국장 |
이 같은 경직성을 보완할 수 있는 대안으로 주목받는 것이 민간 기부금이다. 민간 기부금은 정부 예산이 담아내기 어려운 연구의 '사각지대'를 메우는 역할을 한다. 정부 출연금이 특정 사업 중심으로 집행되는 반면, 기부금은 연구자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시험하는 초기 탐색 연구나 은퇴 이후에도 연구를 지속하려는 석학 지원 등 더욱 유연하게 활용될 수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출연연 최초로 공익 목적의 'KIST 미래재단'을 설립한 것은 이러한 변화의 상징적인 사례다. 2022년 출범한 이 재단은 임직원들이 연봉의 1%를 기부해 조성한 기금을 바탕으로 시작됐다. 이는 연구자들이 연구비의 수혜자를 넘어 과학기술 발전과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스스로 재원을 마련하는 '기부의 주체'로 나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현재 재단은 석학 지원, 장학사업, 사회공헌, 창업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국가 연구기관의 재정적 완충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과학기술 선진국들은 이미 이러한 방식의 연구 지원 구조를 운영해 왔다. 미국의 국립보건원 재단(FNIH)은 1996년 설립 이후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과 글로벌 제약사들로부터 대규모 기부금을 유치해 공공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위기 당시 민관 협력을 통해 백신 개발을 가속한 'ACTIV' 프로젝트는 민간 재원의 유연성과 신속성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독일의 막스플랑크재단 또한 막대한 연구 예산과 함께 민간 기부를 활용해 약 7억 유로 이상의 자산을 운용하며, 기부자가 특정 연구 분야를 지정할 수 있는 '테마 펀드'를 통해 연구자들에게 유연한 연구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에 유입된 기부금은 단순한 연구비 보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민간 기부금은 기부자의 철학에 따라 '실패할 권리'를 허용하는 '인내하는 자본'으로 기능하며, 기존 예산 체계에서 소외되었던 창의적 아이디어의 보호막이 된다. 은퇴 석학들이 연구에 전념하거나 후학을 양성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국가적으로 축적된 지적 자산이 사장되지 않도록 돕는다. 연구 성과가 논문에 머물지 않고 산업화로 이어지도록 '죽음의 계곡'을 넘기 위한 초기 투자를 제공하며, 이는 신산업 창출의 핵심 동력이 된다.
KIST 미래재단의 사례가 전국 출연연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경직된 법적·제도적 환경 개선이 시급하다. 첫째, 세제 혜택의 형평성 제고이다. 현재 대학 기부에 비해 출연연 재단 기부에 대한 세제 혜택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법인세법 등을 개정하여 출연연 기부금도 대학과 동일한 수준의 '특례 기부금'으로 상시 인정받을 수 있도록 규정을 명확히 해야 한다. 둘째, 운영 자율성 확대이다. 기부금을 활용한 인건비 집행이나 연구원 고용 시, 정부의 총액 인건비 규제나 정원 제한에서 예외로 인정해 주는 유연한 인사 지침이 필요하다. 셋째, 투명한 공시와 성과 공유이다. 기부금 사용 내용과 그로 인한 연구 성과를 상세히 공개하여 기부자가 자부심을 느끼고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의 기부금 재단 설립은 단순한 예산 확보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과학기술 생태계가 관료적 경직성을 탈피하고 연구자의 창의성을 극대화하는 '혁신 가속기'를 장착하는 일이다. 국가와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을 다시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종잣돈으로 돌려주는 기부 문화가 정착될 때, 대한민국의 R&D는 비로소 추격형을 넘어 선도형으로 진화할 수 있다. KIST 미래재단이라는 작은 씨앗이 대한민국 모든 출연연에 뿌리내려 과학기술이 사회를 따뜻하게 밝히고 국가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하는 거대한 숲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과학기술 기부는 대한민국이 기술 주권 시대를 당당히 헤쳐 나가는 가장 강력한 사회적 자본이 될 것이다. /정흥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파운드리사업단 책임연구원·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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