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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개구리에게 들어보는 세상

양동길 / 시인, 수필가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18-11-30 00:00
능선 따라 옷 벗은 나무들이 산을 내려옵니다. 가을이 빨리도 떠났습니다. 스산한 가을바람 즐길 요량으로 모처럼 오후 늦게 산에 오릅니다. 함부로 나뒹구는 낙엽을 바라보며 걷습니다. 잠시 사색에 잠겼었나 봅니다. 어두워지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후 5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입니다. 문득, 고개 들어보니 산길 굽이굽이 이미 땅거미가 내렸습니다. 일몰시간을 생각하지 않았었지요. 오싹해졌습니다. 추위도 사라지더군요. 주차장에 도착하니 칠흑 어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시동 걸며,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안주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는 가마솥 개구리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서서히 달아오르는 온도 변화는 감지하기 어렵지요. 경제학 용어에 '삶은 개구리 증후군'이란 말도 있더군요. 서서히 진행되는 사회변화에 자기도 모르게 익숙해져 최악의 결과를 준비하지 못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비슷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해물을 다루는 가게에 가면, 어항 안 물고기가 죽음에 직면해 있음에도 유유자적 유영합니다. 가마솥 안 물고기가 죽을 운명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설렁설렁 헤엄이나 치는 어리석음을 부중지어釜中之魚라 합니다. 문제는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익숙해지는 것이지요. 청와대 비서실장도 비서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익숙함, 관성과 단호하게 결별하자" 했다더군요. 늘 새로운 시각으로 살피지 않으면 큰 낭패를 보게 됩니다.

허접한 필자도 제 몸 살피기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늘 부족함을 느끼지요. 개구리 이야기가 나왔으니 필자에 해당하는 몇 가지 더 살펴볼까합니다.



좌정관천坐井觀天,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본다는 말이지요. 작은 구멍으로 내다보는 세상이 얼마나 작습니까? 그나마 바라보는 것이 다이니, 조각하늘마저 안다고 할 수도 없지요. 하물며 바다를 어찌 알 수 있나요. 우물 안 개구리는 바다를 알지 못하고, 여름 벌레는 얼음을 모른다(井蛙不知海 夏蟲不知氷)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넓고 심오한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식견이 부족한 사람을 일컬어 우물 안 개구리(井底之蛙)라 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세상을 논한다는 것이 항상 불편하지요. 어리석게 생각되어 가능한 한 자중합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까맣게 잊고 살지요. 항상 그 자리에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있으리라 착각합니다. 누구나 약자였고, 누구나 자리를 비워야 함을 잊고 삽니다. 당연히 약자는 보살피고, 미래의 변화를 준비해야 합니다. 때로는 후퇴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개구리도 움츠려야 뛴다했습니다.

부정부패에도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인간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질 일도 아니겠지요. 우리가 흔히 외국어로 착각하고 있는 말 중에 '와이로蛙利鷺'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개구리가 백로를 이롭게 한다.'가 되나요. 고려 말 학자 이규보(李奎報, 1168 ~ 1241, 문신)가 과거에 수차례 낙방한 후 초야에 묻혀 살 때 자신의 집 대문에 붙여놓은 "개구리가 백로를 이롭게 하는데, 오직 나에게 개구리가 없어 인생의 한이다(蛙利鷺 唯我無蛙 人生之恨)"라는 글에서 비롯되었다합니다. 전설이 담겨있다는데요. 옮겨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옛날, 노래를 아주 잘하는 꾀꼬리와 듣기에도 거북한 목소리를 가진 까마귀가 살고 있었다. 꾀꼬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을 때, 까마귀가 꾀꼬리에게 내기를 하자했다. 누구 목소리가 아름다운지, 순결한 백로(白鷺)에게 심판(審判)을 맡기자했다. 꾀꼬리는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노래를 잘 하기는커녕 목소리 자체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노래 시합을 제의 하다니, 자신 있게 시합에 응했다. 그리고 숲속에서 목소리를 더욱 아름답게 가다듬고자 노력했다. 반대로 시합을 제의한 까마귀는 노래 연습은 안하고 개구리 잡으러 논두렁을 돌아 다녔다. 그렇게 잡은 개구리를 백로(白鷺)에게 갖다 주고 뒤를 부탁했다. 경연에서 까마귀가 이겼다."

우리가 쓰는 말 그대로 와이로를 썼던 것입니다. 와이로는 다양하지요. 금품만 뇌물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안다는 것도 선악을 구분 못하면 일종의 '와이로'가 됩니다.

세상엔 수많은 종교 집단이 있습니다. 모두가 성전을 가지고 있지요. 성전은 신도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주인도 당연히 신도입니다. 신도 없는 성전은 존재의미가 없지요. 따라서 도를 닦거나 설법하는 사람 소유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권력에 익숙해진 당사자나 주위 사람은 그를 깨닫지 못합니다. 나아가 주인 행세하는 사람의 엄청난 과오가 있어도 그조차 깨우치지 못합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집권했으니 내 마음대로 운영하겠다, 해서는 안 되겠지요. 사회변화를 전혀 모르거나 외면하고, 과거나 환상에 사로잡혀 아집에 집착하는 것도 돌이킬 수 없는 과오가 됩니다.

익숙함이 문제 되는 것은 습관적인 일상 언행뿐이 아닙니다. 사상이나 현실인식도 마찬가지 아닐까합니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양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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