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속 백제' 남고손 곳곳 정가왕 부자 발자취 느껴져

<일본 속의 백제숨결> 20. 미야자키의 백제마을

안영진 중도일보 前 주필

안영진 중도일보 前 주필

  • 승인 2009-11-26 10:07

신문게재 2009-03-10 12면

 일본의 국가기원은 백제인이 주도를 했고 일본 황실혈통은 그래서 <도래계>라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왔던 내용이다. 그러나 일인들은 한민족 혈통이라는 점을 애써 외면, 그 시조가 하늘에서 강림한 천손(天孫)이라 둘러대며 야릇한 신화를 내세워 역사왜곡을 일삼아왔다.
 
 그러니까 역사의 한 구간, 한 단면만을 왜곡하는 게 아니라 근본(始發)부터 날조해왔다는 걸 우리는 모를 까닭이 없다. 세계적인 석학 에가미(江上波夫) 교수는 일본의 건국신화가 한민족 가야국 것을 모방했고 건국신 <니니기노신(尊)>은 가야계라고 설파한 일이 있다.
 
 그는 또, 기마민족 도래설을 주장, 백제, 고구려 등 기마군단이 건너와 일본 열도를 장악했다고 설파한 일이 있다. 그 증거로 고분에서 출토한 자기(수혜기)와 마구(馬具), 투구 등을 내세웠다. 그리고 후쿠오카 인근 고분벽화의 기마병 상륙장면을 증거로 제시한 바 있다. 본란에선 이를 수차 소개한 일이 있다.
 
▲ 큐슈전역의 백제유적
 
▲ 백제 정가왕과 복지왕 추모제 <시와즈 마츠리(師走祭の)중 笠取塚에서 마지막 헤어짐을 한 후 신체(神體)에 갓을 붙이고 국도로 나오는 모습.
▲ 백제 정가왕과 복지왕 추모제 <시와즈 마츠리(師走祭の)중 笠取塚에서 마지막 헤어짐을 한 후 신체(神體)에 갓을 붙이고 국도로 나오는 모습.
 한민족이 왜국으로 들어간 루트를 살펴보면 한 줄기는 한반도와 아주 가까운 큐슈(九州)지방이며 또 한 줄기는 긴기(近畿:나라, 오사카, 교토)일대로 건너간 것을 말한다. 일인들이 자랑하는 <야요이>문화란 긴기지방에서 꽃피운 백제계 발자취를 말하는 것이지만 그 전성기를 야마다이고쿠(邪馬台國)시대라 보는 시각이 있으나 이젠 큐슈지방이라는 소리가 날로 무게를 더해 가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구마모토 현 다마나(玉名)군 소재 에타 후나야마(江田船山)고분 발굴 이후 그런 추정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고분 출토품이 공주 무령왕릉 것을 빼다 박은 듯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학자 중에는 구마모토가 옛날 백제의 담로(擔魯)였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담로란 백제왕실이 지배하는 직할령(直轄領) 같은 걸 말한다.
 
 이렇듯 큐슈에는 백제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우선 다사이후(太宰府)의 백제성이 그렇고 구마모토 기쿠치성(菊智城) 또한 백제지휘 하에 축조한 것임이 드러났다. 일각에선 구마모토 지방을 <비류백제계>가 지배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온조백제>와 혼동한데서 나온 말이 아닌가싶다.
 
 후나야마 고분의 출토품이 공주무령왕릉 것을 빼다 박은 듯 닮아 있기 때문에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비류백제가 일찍이 멸망했다는 걸 전제한다면 비류백제설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 다음은 일본의 건국신들이 칩거했다는 미야자키의 다카마노하라(高天の原)에 대해 우리는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죠몽>시대를 떠올려본다.
 
 <에가미>교수의 주장처럼 건국신 니니기노(尊)가 가야계라는데 우리는 굳이 이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가야(가락)국 또한 우리 한민족 혈통이라 보기 때문에 그러하다. 다시 말해서 개국신이 가야계(혈통)라면 그의 누이 태양신(天照) 역시 가야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밖에도 미야자키(宮崎)에는 초대천황 진무(神武)의 신궁이 있고 낭고송(南鄕村)에는 백제마을(百濟の里)이 있다.
 
▲ 낭고손엔 두 백제왕 신사
 
 낭고손은 희한한 마을이다. 이 마을엔 백제왕손 10대가 살아왔다는 전설과 함께 갖가지 유적과 유물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주민들 중에는 자신이 백제후예라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곳엔 한 때 7000여명이 살면서 임업과 농업에 의존해온 마을이었으나 젊은 층이 대거 대도시로 빠져나가 이젠 겨우 3000여명이 엉담겨 살고 있으나 주민들의 긍지만은 대단하다
 
 백제왕손 10대가 살아왔다는 역사성 때문에 관광지로서 한 몫을 하는 마을…. 이곳엔 백제의 <정가왕>과 그 아들 <복지왕>을 모신 두 신사가 있다. 부왕은 미카도(神門)신사에, 아들 복지왕은 히노기(比木)신사에 각각 모시고 일천 수백 년 동안 주민들은 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왔다는 기막힌 사연을 안고 있다.
 
 그럼, 백제왕이 왜 후미진 이곳 오지에 들어와 은거했을까? 660년 백제가 망하자 왕족을 비롯 측근들이 대거 일본으로 망명을 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처음엔 긴기(近畿=나라, 오사카, 교토)지방으로 건너갔다가 일본에 전란이 일자 이를 피해 북큐슈(九州)지방으로 피한다는 게 이외의 결과를 가져왔다.
 
 두 척의 배에 분승, 피난길에 올랐으나 <세도아니카이>에서 풍랑을 만나 방향타를 잃고 엉뚱한 곳으로 표착을 한 것이다. 정가왕은 휴가(向日)의 가네가(金ケ濱)해변에 아들 복지왕은 90km나 떨어진 기조죠히기(木城町比木)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쫓기는 몸이었다. 추격군이 신라계였는지, 아니면 고구려계인지 또는 파국 후 백제계 간의 반목세력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얼마 뒤 부왕의 급보를 받은 복지왕은 군사를 이끌고 적과 싸워 격퇴시켰지만 안타깝게도 부왕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곳 즈카노하라(塚の原)에 막내 <왕자>와 함께 묻혔다.
 
 훗날 정가왕은 <미카도> 신사에 그리고 복지왕은 히키(比木)신사에 모셨고 어머니는 고마루가와(小丸川)에 묻히는 등 백제왕족의 애사(哀史)로 점철된 곳이 바로 이 백제마을인 것이다.
 
▲ 정가, 복지 정통성 시비
 
▲ 남향촌과 부여읍의 자매도시 제휴식.
▲ 남향촌과 부여읍의 자매도시 제휴식.
 여기서 우리는 백제사를 되짚어보면서 왕실의 연대(世代)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정가왕과 복지왕은 몇 대왕이냐 하는 점이다. 백제 마지막 왕은 당나라 소정방에게 끌려간 <의자왕>과 장남 융(隆)이라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그 당시 차남은 왜국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오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정가>와 <복지> 두 인물을 왕으로 부르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소박하고도 당연한 질문이요, 문제제기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아직도 현지일인들이나 한 ? 일 양국 학자들도 명확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백제가 망한 후 왜국에 <망명정권>을 세웠다거나 아니면 정가왕 부자가 의자왕의 적자(嫡子)여부를 따져봐야 할 일이다. 이점은 앞으로 연구 ? 정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어떻든 남고손 백제마을은 일본 속의 백제유적의 보고라 보아 틀릴 게 없다.
 
 이 마을엔 정가왕과 복지왕을 추모하는 추모제 <시와즈 마츠리(師走祭の)>가 해마다 열리는데 이 축제는 1947년까지 11일 간에 걸쳐 거행해오다 요즘엔 2박 3일 행사로 축소되어 있다. 제례의식은 가꾸라(神樂)형태로 치러지며 주민전체가 참여, 전통가무를 비롯 불꽃놀이와 왕부자의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는 신(Scene)으로 행사는 절정을 이룬다.
 
 여기서 부자왕이 헤어질 때 아쉬워했듯이 소리 높여 <오, 사라바!(オ, サぅ バ)=안녕, 잘 가시오!)>를 연발하며 눈물을 흘린다. 다음해 재회할 것을 약속하는 이별의 인사인 것이다. 지난 93년 대전 EXPO때 일이다. 정가, 복지 두 백제왕 혼백이 선대왕에게 문후를 드리기 위해 바다건너 옛 왕도 부여를 찾아온 일이 있다. 간소한 차림의 문후(예방)행차지만 조금은 희화적인 면이 없지 않다.
 
 두 왕의 신주(위패)를 매미채 비슷한 망태기에 담고 공항을 거치는 절차가 가히 극적이었다. 검열관이 신주보따리를 펴보라는 말에 <남고손> 대표자가 난색을 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성체(聖體)는 풀어볼 수 없는 것이라며 <성체를 보는 자는 눈이 먼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공항직원은 그냥 통과시켰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는 백제왕 신주라 해서 너그러이 봐준 셈이었다.
 
 <남고손>엔 또 <정창원>이라는 게 있는데 <정창원>이란 무엇인가? 이는 일본 황실의 보물창고를 말하는 것으로 일본엔 그것이 딱 두군데가 있다. 하나는 나라(奈良)의 정창원, 또 하나는 이곳 <남고손(백제마을)>의 <서 정창원>이 그것이다. 산간오지 <남고손>에 정창원을 세웠다는 건 이와 같이 백제사와 깊은 연관을 지닌 때문이다. 동경(거울)을 비롯 백제풍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 계룡장학회와 <남고손>
 
 인구 3000명이 사는 이 마을은 백제의 기운을 타고 이어온 역사의 고장으로 오늘에 와선 관광마을로 탈바꿈하고 있다. 백제마을을 처음 답사한 것은 부여군으로 당시 이석호 부여문화원장과 임동권 민속학자 등이 내왕하며 자매를 맺었다. 보다 본격적인 접촉은 JP와 이인구(李麟求) 전의원(계룡건설회장)이 팔을 걷고 나서면서 활발해졌다.
 
 JP는 그곳 백제관(百濟の館)낙성식 때 현판을 써서 달았다. 현지 주민들은 <百濟の館>이라 써주길 바랬으나 JP는 <百濟之館>이라 써서 화제를 일으킨 일도 있다. 이를 놓고 JP의 재치라고 주변에선 말했다. 또 그곳엔 부소산성의 정자를 본 딴 누각을 세워 청춘남녀의 만남의 장소로 단장해놓았다. 이 정자는 부소산 정자를 그대로 본딴 것이다.
 
 특히 주말, 휴일에는 현지인뿐 아니라 외지 관광객이 이 정자에 올라 젊음을 찬미하는 데이트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또 객사(客舍)에서는 투숙객을 위하여 백제풍 사물놀이를 선보이는 한편 한국어도 가르친다. 여기에는 또 한국 전통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장승이 관광객을 맞고 있는데 이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장승은 이인구 전의원이 국내에서 조각 공수, 현지에 세운 것으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그때 이의원은 한 ? 일의원연맹 한국 측 간사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일주일간 현지에 머물며 장승을 세웠던 이 의원의 측근 조중원(계룡장학회 간사)는 그때 일을 회상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한다. 이인구 의원은 그 무렵 현지 관청에 우리 교포 여직원을 심었고 충남과의 교류, 연계 등에 진력을 다했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 그는 계룡장학회를 설립, 그 안에 해외문화탐사(연구)팀을 발족 일본 속의 백제유적뿐 아니라 중국 속의 백제사 연구 심지어 고구려의 문화 복원에도 심혈을 기울인 바 있다. 학자와 언론인, 동호인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진두지휘, 정열을 불태우며 오늘에 이른다. 거기에 많은 것을 아낌없이 투입한 것이다.
 
 그는 또, 연구(탐사)팀을 이끌고 큐슈일대는 물론 아스카문화 유적지를 10여 차례 탐사한 바 있고 나서 귀국보고, 세미나와 토론회를 갖는 등 눈부신 활동을 펼친 바 있다. <미야자키>의 백제마을…. 거기에는 이렇듯 일천수백 년의 백제인 발자취와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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