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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소멸의 정치학

정용도 미술비평가

김소희 기자

김소희 기자

  • 승인 2019-11-11 10:10

신문게재 2019-11-12 23면

정용도 미술비평가
정용도 미술비평가


죽음은 삶의 다른 이름이다. 욕망과 야망은 삶의 내용이고 때로 치열한 삶의 조건이기도 하지만 죽음과 함께 소멸된다. 죽음 이후 이 세상에 남겨지는 것은 조그마한 이름이고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진다. 죽음은 삶으로부터 시작되고 삶은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많은 사람들의 행동은 이런 인간조건들을 잊은 듯 스스로 겸손해야함을 망각한다. 이런 망각들은 삶을 무력하게 만들고 죽음을 희화화 시킨다. 누군가가 죽었을 때 남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 대해 평가함으로써 다시 자신들의 죽음을 망각하는 과정으로 복귀하고 자신들의 다가올 죽음을 위로할 변명을 찾아낸다.

요즘 한국 사회는 개인들 삶을 경제적 풍요, 달리 말해 한 개인이 축적한 자본의 양이 한 사람의 존재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인 양극화 현상이라고 말하는 이런 삶의 그림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TV나 영화의 내용이 되고 돈의 축적에 유능한 사람들은 성공한 삶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물론 대부분의 영화나 TV 드라마 속의 내용은 권선징악을 가치로 내세우지만 관객이나 시청자들의 무의식은 경제적 우위에 있는 등장인물들의 권력에 더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인간의 마음이 자신의 세상을 이기적인 환상으로 오염된 그림들로 장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적으로 혹은 예술적으로 삶과 죽음은 동의이다. 많은 예술작품에서 묘사되는 죽음은 개인들에게 그들 삶을 성찰해보라는 요구를 한다. 철학자들이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은 신의 존재성과 영원불멸의 세계를 그들의 논리로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나 헤겔의 "자기정체성" 회복의 철학적 단계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해체시키는 작업이었다. 부정적으로 보면 이들이 구축한 논리는 결국 죽음에 대해 살아있는 사람들의 변명거리를 제공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영원할 수는 없다. 자연마저도 생성과 소멸의 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00년을 버티지 못하는 인간에게 삶은 욕망이자 영광이고 더 본질적으로는 개인들에게 주어진 순수한 기회이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시간에 대해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개인의 행복은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계가 있다. 수많은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죽음을 해석해 왔지만 그들 관점이 진실이나 사실인 것은 아니다. 도덕적 판단은 가능하지만 참과 거짓의 판단은 불가능한 추측성 의견들일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사건들이 발생한다. 그것이 사회적인 사건이든 개인적인 사건들이든 그런 사건들은 인간들 삶의 영역에 무언가 흔적을 남겨놓는다. 이런 것들은 역사가 되기도 하고 개인적인 기억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기념하기 위해 그런 기억을 반복적으로 되살리며 살아간다. 삶은 죽음의 기념비이기 때문이다.

정용도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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