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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필톡] 그저 끌어안고 사는 법을 배워야지

우난순 기자

우난순 기자

  • 승인 2019-11-13 10:19

신문게재 2019-11-14 22면

린다
사라 코너의 귀환. 돌아온 린다 해밀턴. '터미네이터' 1편의 무시무시한 강열함이 아직도 선명한데 벌써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1, 2편에서 어두운 미래에 맞선 사라 코너가 겪는 공포감을 잊지 못한다. 그런데 나이 60이 훌쩍 넘은 린다 해밀턴이 여전사가 돼 스크린을 꽉 채웠다. 은발의 커트 머리를 뒤로 넘기고 라이방 선글라스를 낀 사라 코너, 아니 린다 해밀턴은 내가 흠모해 마지 않은 그 모습이었다. 레브-9에게 쫓기는 그레이스와 대니 앞에 나타나 바주카포를 어깨에 메고 적을 향해 폭탄 세례를 퍼붓는 근육질의 사라 코너. 내 심장은 펄떡거리고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주먹이 쥐어졌다. 나는 2시간의 러닝 타임 동안 탄탄한 근육과 주름 가득한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 넘치는 린다 해밀턴이 되었다.

피 끓는 청춘의 시절, 어른들로부터 종종 꾸지람을 듣곤 했다. 대학 시절 어느 가을에 노란 셔츠에 꽃무늬 넥타이를 매고 캠퍼스를 활보했다. 어느 날 내가 존경하는 분이 정색을 했다. "여자가 넥타이를 매다니." 비교적 개방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여느 남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난 그저 넥타이가 예뻐서 그렇게 입었을 뿐이었다. 여자라고 해서 넥타이를 매지 말란 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른 살엔 밤송이머리를 한 후 무수한 언설을 들었다. 무슨 일 있냐, 반항하냐…. 엄마는 집에 친척이 왔을 때 나를 옆방에 밀어넣고 못 나오게 했다. 일찍이 프로이트는 여성들이 '남근 선망'으로 괴로워한다고 주장했다. 페니스 소유자에게 사회적 특권을 부여하는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을 부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어릴 적 엄마가 맛있는 닭다리를 큰오빠에게 주는 걸 본 내가 넥타이를 맨 행위는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문명의 발달과 함께 역사 속의 주인공은 남자의 몫이었다. '터미네이터:다크 페이트'처럼 무지막지한 자동차 추격 장면이나 비행기 추락 장면에서, 여 전사들이 현란한 액션을 선보이며 운명을 뒤바꿀 전쟁을 치르는 예가 있었던가. 슈퍼 솔저 그레이스가 체인을 손목에 감고 적을 향해 휘두르는 멋진 모습을 기존의 남성들은 허용하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멍청한 존재거나 수동적인 객체로만 등장시켰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여성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창세기의 이브처럼 아담의 신세를 망친 조심성 없는 경박한 여성처럼 말이다. 왜 남성은 여성에게 권력을 나눠주는 걸 극도로 싫어할까. 오늘날 한국 여성들은 사회적인 능력이 없으면 자기성취감을 느낄 수 없는 구조 속에 산다. 육아와 가사가 여성의 사적인 영역 속에서 여성은 남성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경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82년생 김지영'처럼 맘충 소리나 듣기 십상이다.

하지만 일부 진보적인 학자는 남근 선망으로부터 고통받는 건 남자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권위의 상징을 지녔지만 현실은 이들이 권위를 누리지 못한다는 느낌을 갖기 때문이다. 이 불안의 징조가 그리스 신화 메두사에서 촉발되지 않는가. 메두사는 바라보는 남자를 돌로 만든다. 남성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면서 남자를 무력화시키는 괴물. 남성의 권위를 위협하는 여성에 대한 불안은 곧 적대감으로 나타난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혐오가 페스트처럼 창궐하는 지금, 이들의 과잉적인 제스처엔 불안한 현실이 감춰져 있다. 인간은 얼마나 연약하고 불안정하며 취약한가. 이 가련한 남자들은 억울함과 피해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생물학적 남성성을 과시하던 남자들이 진정한 위기를 맞은 것이다. 사라 코너는 거대한 운명 앞에서 묵직하게 말한다. "그저 끌어안고 사는 법을 배워야지." 사라 코너와 대니, 그레이스. 늙고 힘없는 T-800을 들쳐 메고 같이 가야 하지 않겠나. <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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