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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광장] '조선어학회 사건'을 상기하다

백낙천 배재대 인문사회대학장

이현제 기자

이현제 기자

  • 승인 2020-10-21 08:31
백낙천교수
백낙천 교수
10월은 한글의 의미를 되새기고 자랑스러운 한글을 문화유산으로 가진 것에 넘치는 자부심을 갖고 이를 기리는 문화의 달이다.

이번 10월 9일은 세종이 만드신 한글을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제정한 574돌을 맞이하는 한글날이었다. 한글날은 한글이 반포되고 국보 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이 편찬된 1446년을 원년으로 삼고 있다.

한글날은 1926년 '가갸날'로 시작해 1928년 한글날로 이름이 바뀐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6년에는 한글날을 공휴일로 정해 기념하기 시작했지만, 1990년에 경제 논리를 앞세운 단체들의 요구로 공휴일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고 한글의 참된 가치를 되새기기 위한 한글날 기념 의식이 점점 희박해져 갔고, 이에 한글 관련 단체의 '한글날 국경일 승격 운동'으로 2005년에 한글날이 국경일로 승격·지정돼 2013년에는 한글날이 공휴일로 다시 지정됐다.

그런데 문화의 달 10월에 한글날과 함께 우리가 의미 있게 새겨야 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다. 1942년 10월 1일 새벽을 기해 일제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에 대한 탄압과 검거를 자행해 이중화, 장지영, 최현배, 이극로, 한징, 이윤재, 이희승, 정인승, 김윤경, 권승욱, 이석린 등 사전 편찬의 핵심 인물 11명을 검거했다.

이후 1943년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돼 갖은 고문을 당했는데, 이 중 이윤재는 1943년 12월 8일에, 한징은 1944년 2월 22일에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는 등 다수의 회원이 옥고를 치르고 우리말 우리글에 대한 수난이 이뤄졌으니 이것이 바로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우리가 '조선어학회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통해 민족혼을 살리려는 선각자들 덕분에 일제 치하에서도 민족어를 정립하려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그 한글 정신과 함께 오늘날 우리가 한글을 향유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기 위한 한글 운동을 현실적이고 실천적 입장에서 전개했다.

즉, 우리말과 우리글은 식민지 극복을 위한 저항의 표상으로 구체화했으며, 민족어로서의 위상을 확립하기 위한 방향으로 국어 의식이 표출됐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일제의 우리말 말살 정책에 저항한 조선어학회가 있었다.

이 시기 일제는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면서 점진적으로 민족어를 말살해 나갔지만, 조선어학회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전국적인 우리말 강습회를 개최했다. 그러다 각고의 노력으로 '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목전에 두고 있던 차에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태극기를 그린 사건이 일본 경찰에 발각돼 취조받는 과정에서 영생여고 교사였고 조선어학회에서 사전 편찬 일을 맡은 정태진 선생을 이른바 '함흥 사건'과 관련시켰다. 이를 빌미로 조선어학회를 급습했는데 이것이 1942년 10월 1일 일어난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한편, '조선어학회'에서 편찬한 '말모이' 즉 사전 원고가 우여곡절 끝에 해방되고 한 달이 지나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발견됐는데,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조선말 큰사전'에 얽힌 우리말과 우리글을 목숨처럼 지키려고 했던 선각자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이 2019년 초에 개봉된 영화 '말모이'다. 그리고 민족의 질곡과 함께 한 '조선말 큰사전'은 1947년 10월 9일에 드디어 첫째 권이 출간됐다. 여러모로 우리말과 우리글을 통해 민족혼을 살리려고 했던 선각자들의 이야기가 새삼 떠오르는 10월의 어느 뭉클한 날이다.
백낙천 배재대 인문사회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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