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교류와 공존]조선남자와 결혼한 일본인여성 어느새 '4명뿐'

3. 한·일 낮고도 큰 목소리
남편따라 한국 넘어온 일본인 여성들
사회와 친족부터 반일 냉대 주름진 삶
부친 독립운동 김용성 이사장 이들 돌봐
국가 나서지 않던 일 복지사업으로 구호
"부용회 할머니 3명 남아 조사·기록 없어"

임병안 기자

임병안 기자

  • 승인 2022-12-01 17:20

신문게재 2022-12-02 8면

나자레원3
국내 유일한 재조선 일본인여성 복지시설인 나자레원. 1972년 이래 나자레원을 통해 일본인여성 147명이 귀국하고 많게는 30명이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과 결혼해 살다가 광복과 함께 한국에 정주하게 된 일본인 여성들이 있다. 이들을 '일본인 처(在韓日本人妻)'라고 부른다. 조선인 남편을 따라 한국에 정착했으나, 반일 소용돌이 속에서 사회와 친족으로부터 냉대와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살아야 했다. 한·일 두 나라의 역사에서도 잊힌 존재가 된 이들을 품은 것은 복지사업가 김용성(1918~2003) 씨와 부용회(芙蓉會)와 후원회 자조 모임이었다. 일본군에 아버지를 잃고 공주 영명중에서 어렵게 학업을 이어간 이가 훗날 민족을 초월해 한국에 남은 일본인 여성을 돕는 과정은 묵직한 울림을 준다.

나자레원1
경북 경주 나자레원 일본인 여성이 머물던 방이 잠시 비어 있다. 방에 머물던 할머니는 건강을 살피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현재 나자레원에는 한 명이 생활하고 있다.
'일본인 처'를 구호하는 국내 유일한 복지시설을 찾아 경북 경주 나자레원을 찾아갔다. 한국과 일본의 국제결혼은 지금도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일인데 광복 직후 한국에서 생활한 일본인 여성을 돕고 보호해야 했다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은 채 불국사 토함산 자락의 나자레원에 도착했다.

기와지붕을 얹은 2층 규모로 1972년 설립돼 50년 역사의 복지시설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정갈하게 첫인상이 다가왔다. 주변에 같은 사회복지법인이 운영하는 장기요양시설과 주간보호시설이 있어 그곳에서는 누구를 부르는 말소리부터 사람이 오가는 인기척이 바깥까지 전해졌으나, 나자레원만큼은 고요하게 낮게 웅크린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런지 궁금증은 어렵지 않게 풀렸다.



"지금 저희와 함께 지내는 일본인 여성은 한 명 계시고 며칠 전까지 이곳에서 지내던 어르신 두 명은 건강이 악화해 병원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송미호 나자레원장은 기자에게 실내화를 건네며 간략히 설명했다. 며칠 전 기자의 전화를 받고 공주와 대전에 특별한 인연이 있다며 선뜻 시간을 내어준 그였다.

송미호 원장1
대학생 때 자원봉사를 위해 방문한 것이 인연이 돼 나자레원 안팎의 살림을 살피는 송미호 원장.
-나자레원을 찾아오는 일본인 여성에게 어떤 사연이 있나요?

▲일제강점기 조선인 남편을 만나 광복 후 일본에서 대한해협을 건너 한국으로 이주했던 이들이고, 예상하지 못했던 반일감정을 마주하면서 말 못 할 고충을 겪는 여성들입니다. 귀국해서 보니 남편에게 본부인이 있어 제대로 된 가정을 이룰 수 없었으나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구박을 견뎌내 남거나, 남편과 자식으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한 분들입니다. 한국 사람을 사랑해 찾아왔으나 결국 이 나라 저 나라에서 모두 상처를 겪었습니다.

-일본인 여성 구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광복 후 한국에 정착한 일본인 여성 중에서 차별 등으로 일본으로 귀환하고 싶으나 국내 호적 등이 정리되지 않아 출국할 수 없는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재판을 통해 이혼절차를 정리해야 귀국할 수 있었는데 일본인 여성들에게 그러한 과정이 쉽지 않은 일이었죠. 결국, 귀국시켜달라는 시위가 있었고 이러한 일들이 뉴스로 타전돼 주목을 받았습니다. 또 김용성 설립자께서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인 일본인 여성 두 명을 면회하고 딱한 사연을 접하면서 출국 또는 정착지원 그리고 시설 내 요양의 방식으로 구호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나자레원을 잠시 견학하는 동안 이곳에서 지내는 한 할머니는 기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국가인권위원회 월간 '인권'과 도쿄 가쿠게이대학 이수경 교수의 '한일 교류의 기억' 등에 따르면 강점기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일본 본토에서 조선인과의 혼인을 적극적으로 권장했고 1944년 초 1만7000쌍이 한·일간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조선인 남성과 결혼하는 일본인 여성은 광복을 맞아 남편이 고향으로 귀국하게 되면서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가족 내에서도 냉대를 받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일본과 한국이 같은 국가일 것으로 여기고 한국으로 건너왔으나 강점기 우리 민족을 괴롭힌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거리를 뒀고, 일본에서는 정부나 친인척을 버리고 떠난 사람으로 여겨 더는 품지 않고 이들이 귀국을 원할 때 손길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부용회(야마구찌마스)
안양로 부용회 후원회장이 경기도에 거주하는 야마구치 마스에 씨를 방문해 안부를 살폈다.  (사진=부용회 후원회 제공)
일본인 여성들의 자조 모임인 부용회(芙蓉會)에 마지막으로 남은 3명의 구성원 중 한 명인 야마구치 마스에(93)씨도 아이들이 성장할 때는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쉽게 말하지 못했다. 일본 홋카이도에서나 남편을 만나 1947년께 한국으로 이주했는데, 아이들이 손가락질을 당할까 봐 자신을 밖에 쉽게 드러내지 않았고 조심히 지냈다. 남편도 귀국 후 학교 음악 교사로 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공무원으로 직업을 바꾸고 나서야 '쪽발이 년'이니 뭐니 주변에서 수군대던 말들도 잦아들었다.

광복 전 한일 관계상 '동일국가' 내에서 결혼으로 여겨져 일본과 한국 국적을 이중으로 보유하거나 아예 한국 국적이 없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양국 어느 정부에서도 이들의 국적을 적극적으로 정리해주지 않았다. 나자레원은 국내 유일의 일본인 여성 복지시설이면서, 국가를 대신해 이들의 귀국을 돕고 혼자서 지내는 여성에게는 생활비를 지원하고 더 나아가 여생을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내줬다. 호적 등 법적 절차를 대행해 일본인 처 147명이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왔고, 80~90세를 넘은 할머니들이 한때는 30명 남짓 이곳에서 생활했다. 일본인 아내가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가장 큰 이유는 한국 사회인의 반일감정과 어려운 경제여건 때문이었다. 부용회는 한때 회원 3000명에 달하고 2009년 기준 충청도 지역 25명의 회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파악되지 않는다.

지난 3월 타계한 고 아오키 츠네(1928~2022) 씨의 사연은 한국에 이주한 일본인 여성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일본 홋카이도 자신의 집에서 하숙하던 조선인 남성과 일본에서 결혼 후 한국으로 이주한 그녀는 손찌검 심한 남편을 피해 가출하고도 혼인관계가 정리되지 않아 일본으로 귀국할 수 없었다. 전쟁 중에 막내 아이를 잃고 남은 두 명의 자식과도 함께 지낼 수 없는 운명이었던 그녀는 대전 이발소에서 일을 돕고 부산에서 건어물 장사를 하며 서울에서는 바느질 등의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억척스럽게 살았다. 마지막까지 부용회에서 활동하며 같은 처지의 일본인 여성을 도왔다.

1998년부터 일본인 할머니 곁을 지킨 안양로(60) 부용회 후원회장은 중도일보와 통화에서 "한일관계가 나쁠 때는 주변으로부터 본인뿐만 아니라 자식까지 손가락질 받고 구박당해 결국 혼자서 외롭게 살아온 분들이 많았고,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살아온 이들도 있었다"며 "한국에서 쓸쓸하게 지내는 이들을 돕기 위해 제가 종사하는 관광업계 지인들과 뜻을 모아 후원회를 만들고 일본 고향 방문을 지원하고 온천에서 자조모임도 가졌는데 이제 살아 계신 분이 얼마 남지 않아 안타깝다"라고 심경을 밝혔다.

특히, 나자레원을 설립한 김용성 초대 이사장은 부친이 일본강점기 독립운동 행적과 일경에 체포된 옥사한 가족사에서도 일본인 여성을 돌봤다. 김 이사장은 충남 공주 영명중학교에 입학해 어렵게 학업을 이어가 1947년 그의 고향인 함경북도에서 양로원을 설립하고 1952년 경주에 미혼모 시설을 마련하는 등 한국 사회복지의 개척자로 살았다.

송미호 원장은 "강점기 피해에 대한 기억으로 일본인 여성들을 돌보지 않던 때 초대 이사장께서는 그나마 갖고 있던 자산을 매각해 이곳에 나자레원을 마련해 인류애를 실천했다"라며 "혼자 거주하는 여성을 돕기 위해 충남 대천에도 찾아갔으나 이들에 대한 정확한 조사나 기록이 있는 게 아니어서 여전히 역사의 그늘에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경주=임병안 기자 victorylba@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통해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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