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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빈 페이지 남겨둘 셈인가

임병안 사회과학부 차장

임병안 기자

임병안 기자

  • 승인 2024-01-07 15:37

신문게재 2024-01-0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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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안 차장
독자 여러분께서 알고 계시다시피, 저는 요즘 보문산 동굴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갑천습지를 탐사하는 중에 동굴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동굴은 보문산에 더 많은데 얼마나 있는지, 누가 조성했는지 조사가 필요하다는 안여종 대전문화유산울림 대표의 조언을 듣고 지난해 11월부터 본격화한 취재입니다. 결과적으로 7개의 동굴을 찾고 화약고로 여겨지는 시설물 1개를 발견해 독자 여러분께 소식을 전했습니다. 제가 발견하거나 목격하지 못한 동굴이 보문산에 더 있을 것입니다.

호동과 석교동에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동굴 두 곳을 탐사했을 때까지 이곳이 석탄이나 금처럼 지하자원을 채취하려고 개발했을 거라고 추측했습니다. 단단한 바위를 뚫고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과정에 동원되었을 인력과 화약, 장비를 생각하면 개인이나 마을 단위 노력으로는 이뤄질 수 없고, 기업이 이윤을 위해 큰 자본을 투자해 몇 개월간 반복했을 규모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대전대 한 교수께서 보내주신 1934년 조선총독부 관보를 보아도, 일제시대 발행된 옛날 신문을 찾아봐도 신탄진 지역에서 사금광산을 개발했고, 산내에서는 석탄광을 찾았다는 내용은 보였으나 보문산 동굴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천안에서 사금광산 개발이 무분별하게 이뤄져 농토가 피폐해져 농민들이 들고일어섰다는 보도가 있는 때에 보문산 북동쪽 방향 직선으로 1.2㎞ 내에 동굴 7개가 자원개발 목적으로 조성됐다면 부사동과 호동, 석교동 일원에서도 농사 짓지 못하는 오염문제가 제기되었을 것이고 기억은 지금까지 전수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만난 마을 어르신 중에 동굴 조성 당시를 기억하는 분들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대전고 동창회장을 역임한 원로기업인 박영규 회장이 대전중학교 재학 때 보문산 동굴조성 현장에 근로동원된 기억을 명료하게 말씀해주신 것이 유일한 증언입니다. 특히 그의 선친께서는 신탄진과 충북 영동 두 곳에서 광업을 경영한 가족사를 배경으로 했을 때 그가 대전중 재학 때 여러 학생들과 함께 대전비행장 조성 때처럼 보문산 동굴에 근로동원되어 자갈을 날랐고, 현장에서 지휘는 일본군과 군속(군무원)이었다는 증언은 신빙성 높은 기록이 될 것입니다.



새해를 맞아 일본에 있는 일본인 지인께서 새해를 축하하는 이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답장을 못했습니다. 태평양전쟁을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보문산 동굴을 탐사하며 무거워진 마음에 새해 인사를 전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2022년과 2023년 일본을 찾아 일제강점기 대전에서 태어나 대전을 고향으로 여기는 일본인들과 그들의 교류단체를 취재하고 한일간 교류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이번에 동굴을 취재할 때는 그때와 다른 감정을 느끼고, 이러한 변화에 혼란스럽습니다. 동굴 벽면에 남은 흔적과 화약을 넣었을 구멍을 보면서 이곳에 동원되었을 징집 조선인을 상상했습니다. 대전역을 비롯해 옛 충남도청, 소제동 철도관사촌 그리고 일본인의 별장에서 느끼는 일제강점기에 대한 감정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거운 감정이 물결칩니다. 보문산 동굴이 전쟁을 준비한 시설이 맞다면, 일제강점기 대전을 묘사한 그림에 지금까지 주목받은 시설과 장소 외에도 동원되어 만들었을 동굴도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대전을 떠나지 않고 내내 거주한 90대 어르신 세 분을 찾아뵙고 인터뷰하였으나, 보문산 동굴을 기억하는 분은 박영규 회장이 유일했습니다. 보문산에 이러한 동굴이 있다는 것조차 무시되는 동안 잊혔고, 경험과 기억을 남겨줄 증인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지역 일제강점기 전쟁유산에 대한 기억과 목격한 게 있다면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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