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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연헌 변호사 |
1950년 7월,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북한군을 안심시키고 국군에게 결정적 정보를 제공해 '동락리 전투'의 대승을 이끌어낸 여교사의 기지는 단순한 전설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평범한 시민이 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용기였다. 나에게는 김재옥 선생님보다 더 가까운 곳에 또 한 분의 영웅이 계셨다. 바로 나의 아버지다. 스무 살 청년인 아버지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의 징집을 피해 대구까지 피난길에 올랐다가 그곳에서 바로 국군에 입대하셨다고 한다. 1951년 고지전의 참화 속에서 발목에 총탄을 맞고 제대하셨지만, 아버지는 평생 당신의 부상을 훈장처럼 자랑하지 않으셨다. 전쟁이 끝나고 다리를 절던 아버지에게 마을 이장님이 전상군경(戰傷軍警) 등록을 권유했을 때, 아버지는 단호히 거절하셨다고 한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도리인데, 그 대가로 나라의 돈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버지는 정부의 보훈급여 없이 불편한 다리로 5남매를 키워내셨고, 우리 5남매도 국가유공자 자녀 혜택 없이 잘 성장하였다. 아버지의 그런 노력 때문인지 젊어서 절던 다리도 점차 나으셔서 막내인 나는 아버지가 전쟁 때 다리에 총을 맞으신 것도 모른 채 살다가,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야 그 이야기를 들어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3년이 지난 2015년, 육군본부에서 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가 6·25 전쟁 당시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 수여 대상자였으나, 전쟁의 혼란 속에 전달되지 못해 이제야 주인에게 돌려주려 한다는 소식이었다. 수화기를 든 나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아버지는 입대 당시의 주소지 마을에서 평생을 사셨다. 담당 공무원이 마음만 먹었다면 살아생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을 64년의 세월이었다. 아버지가 그 빛나는 훈장을 가슴에 직접 다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발목의 흉터를 보며 자식들이 가졌을 안쓰러움이 얼마나 큰 자부심으로 바뀌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결국 뒤늦게나마 우편으로 도착한 아버지의 무공훈장을 들고 산소를 찾았다. 아버지 산소 앞에서 훈장을 어루만지며 "아버지, 아버지께서 받은 태극무공훈장이 이제야 왔습니다"라고 조용히 읊조렸다. 이는 60여 년을 돌아 아버지의 고결한 침묵에 조국이 올린 뒤늦은 헌정이었다.
우리는 흔히 6월을 '호국보훈의 달'이라 부르며 매년 관련 행사와 의례를 반복한다. 하지만 진정한 보훈은 화려한 수식어에 있지 않다. 아버지처럼 자신의 청춘과 신체를 바치고도 그것을 권리로 주장하지 않았던 이들의 '숨겨진 자긍심'을 찾아내어 드러내는 것이 국가의 진정한 역할이 아닐까. 동락초등학교의 김재옥 선생님과 이름 없는 전몰, 전상 군경들이 지켜낸 것은 단순히 영토만이 아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삶을 일궈낸 대한민국 특유의 억척스러운 생명력이다. 늦었지만 아버지의 훈장을 찾아준 정부의 '무공훈장 주인공 찾기' 사업이 고맙고도 아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현충일과 6·25 전쟁일이 다가온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일상은 누군가가 포기한 청춘과, 평생을 안고 살았던 신체적 고통 위에 세워진 터전이다. 아버지의 태극무공훈장은 이제 가문이 지켜야 할 가장 귀한 보물이 되었다. 그 훈장의 무게만큼, 우리 사회가 유공자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예우하는 품격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정연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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