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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차마고도 기행기

정교순 법무법인 유앤아이
대표변호사

한성일 기자

한성일 기자

  • 승인 2026-10-2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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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순 법무법인 유앤아이
대표변호사
Ⅰ. 여는 글

뚜벅이산악회에서는 2025년 5월17일(토요일)부터 같은 달 21일(수요일)까지 4박5일 동안 차마고도 여행 계획을 세웠다.

평소 차마고도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운남성 소수민족들과 티베트족(서장족 또는 장족이라 함)이 해발 2,000~5,000여 미터 험악하고 거친 고산지역에서 운남의 보이차와 티베트의 말 등을 물물교환하면서 인적 정보 등을 공유하는 방법으로 살아남은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전에 고려대 행정대학원 아시아문화 최고위과정(이하 아시아전문가과정)에서 흉노 등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유목민족들의 삶에 대해 강의를 들은 후 실크로드, 우즈베키스탄 역사 탐방을 한 바 있다. 대리석의 어원이 된 운남지역 대리왕국의 흥망성쇠와 전에 보이차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어 차마고도 여행은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답사 전 KBS에서 2007년 6부작으로 제작한 특집 다큐멘터리 차마고도 역사기행과 차마고도 유튜브 여러 편을 시청하였다.

그동안 차마고도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차마고도 현지답사를 통해 현장감 있는 지식을 얻기 위한 지적 호기심으로 차마고도 여행에 동참하게 되었다.



Ⅱ. 든든한 차마고도 여행 동반자



차마고도 여행은 일행이 18명이었다. 필자와 인연이 각별한 김선공 태권도 9단 겸 국기원 심사위원, 김근종 전 건양대 호텔경영학과 교수(현 배재대 특임교수), 최진석 전 대전시 국장, 한성일 목요언론인클럽 전 회장 겸 지역정책포럼 공동대표(현 중도일보 이사), 김영상 아시아전문가과정 회장, 이경숙 총무, 이주희 감사가 동행하여 마음이 든든했다.

새연여행사 한치환 대표에 의해 일정이 확정되었다. '답사 여행의 알파와 오메가는 여행 가이드'이므로 한치환 대표에게 차마고도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풍부한 가이드 선정을 수 회 부탁드렸다.



Ⅲ. 차마고도 여행

제1일 차

2025년 5월 17일 새벽 2시 경 대전 한밭수목원 남문 앞에서 관광버스로 인천공항으로 이동한 후 같은 날 오전 6시50분경 중국 동방항공에 몸을 싣고 같은 날 오전 10시40분경 운남성 곤명시 창수이 공항에 도착하였다.

동방항공은 남방항공, 국제항공과 함께 중국 3대 국유 항공사로 세계 10위 안에 드는 큰 규모의 항공사이다. 중형 여행기를 이용하여 기내 공간은 다소 협소하였다.

동방항공은 대부분의 승객이 한국인임에도 우리말로 안내방송을 하지 않아 불편함이 많았다. 이는 중국 중심의 중화사상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곤명으로 가는 도중 실시간 스크린에 비행기 항적 표시가 없어 항로가 궁금하였으나 귀국길에 도착 전 잠시 스크린에 항적 표시를 해주어 비행기가 '인천에서 서해 바다와 상해를 거쳐 거의 직선으로 곤명'까지 간 것을 알 수 있었다.

창수이 공항 입국 절차는 양손 네 손가락과 양손 엄지 지문을 채취하는 등 까다롭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큰 불편함은 없었다. 입국심사신고서 기재내용이 많아 개인정보를 상세하게 수집한다는 불편한 생각이 살짝 들었다.

운남은 '구름 넘어 있는 곳', 곤명은 빛 곤자로 '밝고 빛나는 곳'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곤명은 운남성의 성도로 해발 1,895M이고, 26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으며 24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역사와 여행의 도시이다.

공항에서 처음 만난 중국동포(조선족 호칭 안함) 김성철 가이드는 조선족 자치주 길림성 연변 출신으로 연변 소재 외국어 대학 졸업생이다. 영어 소통능력이 있어 정부 권유로 14년 전에 리장(이하 여강으로 함)에서 유럽 여행객을 상대로 가이드를 한 것을 계기로 가이드인 한족 여인과 결혼하여 여강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필자는 김성철 가이드에게 '차마고도 역사, 특히 소수민족의 삶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해 조심스럽게 부탁하였으나 이 당부가 부질없는, 탁월한 가이드임을 아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곤명에서 점심식사를 중식으로 한 후 근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석림(거대한 돌 숲)으로 이동하여 2시간 동안 세계 최고의 카르스트 지형을 관람하였다.

석림은 25,000년 전에 화산 폭발로 바다 속 석회암이 융기된 후 편무암으로 변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자연의 거대함과 인간의 왜소함, 연약함으로 겸손을 배우게 되었다.

김근종 교수가 얼마 전 등산으로 인한 근육통으로 본격적인 석림 답사에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움이 많았다.

석식은 운남지역 특산물인 송이버섯과 야채, 고기를 섞은 전골 요리에 약간의 바이주(백주)를 곁들여 기분이 좋은 상태로 호텔에 투숙하였다. 숙면을 취했으나 룸메이트인 최진석 전 국장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는지 염려되었다.



가. 운남지역 남조국과 대리왕국의 흥망성쇠

운남지역에는 원주민과 티베트(원주민의 서장(西藏)에 대한 발음을 듣고 유럽인이 영어로 티베트라 함) 지역에서 정정 불안으로 이주한 16개의 대표적인 소수민족이 각각의 언어, 문화 등으로 정통성을 유지하면서 대를 이어 살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 남조국의 흥망성쇠

한무제는 기원전 109년 운남성을 정복한 후 익주군에 편입시켰으나 변방으로 거리가 멀어 효율적으로 통치하지 못하였다.

서기 618년 티베트 지역에 토번이 건국되어 송첸캄보 왕이 주변 지역을 정복하는 등으로 세력을 넓히자 티베트고원 동남부에 살던 이(彛)족과 바이족(백족)은 운남성 남쪽으로 이주하였다.

운남성의 이족은 夷族(東夷族)으로 머리에 꿩(혹은 까마귀) 꽁지털 두 개를 꽂았다고 하여 고구려 유민이었던 것으로 추측이 되고, 1954년 모택동과 주은래가 '쌀농사를 짓는 점'을 감안하여 彛族으로 바꾸었다는 설이 있다(김병호 소설 치앙마이 참조).

바이족은 집, 옷 등을 흰색으로 하였으므로 족 이름이 바이족(백족)이 되었고, 백의민족인 우리와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족과 바이족은 이주한 지 30년 후인 648년 소국을 건국하였고, 653년 당나라 태종 정관 연간에 大蒙國이라 칭하여 당나라에 조공하였다.

당태종은 고구려 정복전쟁에서 패배한 후 후손들에게 '다시는 고구려와 전쟁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고, 신라 선덕여왕에게 '모란꽃 그림과 씨 3되'를 보내자 선덕여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당태종이 "내가 짝이 없음을 조롱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당나라는 토번국이 장안을 침범하는 등으로 위협을 가하자 토번국을 견제하기 위해 대몽국을 지원하였다. 대몽국은 당나라의 지원에 힘입어 738년 운남성 지역 소수민족을 통일하여 남조국을 건국한 후 전성기에 대리로 도읍을 천도하였고, 이 지방에서 세력을 키우던 토번을 격퇴하였다.

남조국은 9세기 중엽 동남아의 라오스, 태국과 미안마 지역 도시국가인 퓨국을 정복하는 등으로 최전성기를 구가하였으나 토번의 이간질에 의한 당나라와의 불화와 왕조 말기의 분열 등으로 국력이 쇠퇴하여 건국 후 164년만인 902년(14대 효애왕 시대)에 권신 정매사의 쿠데타로 멸망하였다.

남조국이 인접한 대국인 당나라와의 외교 실패와 내분으로 멸망한 것을 보고 우리나라 주변 열강과의 외교 관계와 국론 통합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다. 대리국의 흥망성쇠

남조국이 902년에 멸망한 후 운남성은 35년 동안 왕조가 3번이나 바뀌는 혼란을 겪었으나 937년 한족 출신인 절도사 단사평이 나라를 통일하여 대리국을 건국하였고, 大理는 '크게 다스린다'는 의미라고 한다.

대리국은 뒤에는 해발 4,122M의 고봉인 창이산, 앞에는 중국 담수호 7위이자 서울시의 1/3 크기인 얼하이호(洱海)(면적: 251㎢)로 둘러쌓인 천혜의 요지인 대리시(해발 1,972M)에 도읍하였다.

대리국은 소수민족인 바이족이 중심을 이루었고, 남조국과 민족 구성, 문화, 언어, 영토 등 많은 면에서 일치하므로 대리국은 남조국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어 일반적으로 남조국과 대리국을 일컬어 운남 왕조라고 한다.

대리국은 중국 송나라의 문민정책에 힘입어 전성기에는 동쪽으로 송나라, 북쪽으로 토번(티베트), 남쪽으로 대월(베트남)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와 인접한 거대한 내륙 제국을 이루었다 .

종교는 불교 일파인 '아자리' 불교로서 국왕이 왕위를 물려주고 승려로 출가하는 전통이 있었다.

대리국은 송나라와의 적극적인 외교 관계 수립으로 300년간 지속되다가 송나라가 멸망한 후 1253년 신흥 강국인 몽골 쿠빌라이칸에게 군사적으로 항거하는 바람에 멸망하였다.

쿠빌라이 칸은 남송 수도 항주를 정복하기 위해 직접 공격하는 대신 사천성, 운남성을 우회하기로 한 후 운남성 여강까지 내려왔다. 옥룡설산 협곡을 급류로 가로지르는 진사강을 건너지 못한 채 여강 지역에 머물면서 공격 준비를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몽골 군대는 여강 소수민족인 나시족의 도움으로 '양 가죽에 공기를 넣어 다리를 만들어 건너는 방법'으로 무사히 진사강을 건넜다. 이 후 대리국의 허를 찔러 대리시의 북면인 창이산을 넘어 공격함으로써 대리국을 멸망시켰다 한다.

이로 인하여 바이족은 상당 기간 동안 나시족과 혼인을 하지 않을 정도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대리국도 강대국인 몽골과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면 적어도 몽골의 속국 정도로 명맥을 유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대국과의 외교 관계 중요성을 새삼 느껴보았다.

13C 대리국의 멸망으로 대리국에 거주하던 소수민족들이 메콩강을 따라 라오스, 태국, 미안마로 대거 이주하였다. 이 중 타이족,라오족, 미안마족은 각각 태국, 라오스, 미안마의 기원이 되었다.

14C 타이족은 태국 지방에 아유티아 왕국을 세운 후 크메르제국(캄보디아), 미안마 등을 정복하여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제2일 차

같은 달 18일 새벽 5시30분경 기상하여 6시20분경 호텔 식사 후 버스로 7시경 곤명역에 도착하였다. 4시간 정도 걸리는 여강 행 고속열차에 몸을 실은 고단한 여행이 이어졌다.

중국에서 고속열차는 보통 시속 300KM로 달린다는데 이 곳은 해발 2,000M에서 4,000M 이상의 고산지대를 오르는 관계로 시속 200KM 이하로 달렸다. 철로가 단선인 관계로 마주 오는 기차와 교행을 위해 2회 정지하였다.

창가에 비친 소수민족들의 전답은 고산지대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농사 일을 하는 농민들의 고단한 삶이 느껴졌다

중국 정부의 농촌 인프라 구축 일환으로 외딴집에도 도로와 전기시설이 되어 있었다. 이는 집을 지어 부자가 되려면 '길부터 내라'는 중국 속담과도 연관이 있다고 하였다.

곤명과 여강 중간 지점에 대리지역이 있었다. 이 곳에 서울 면적의 1/3 정도로 엄청나게 큰 리해 호수를 따라 대리왕국이 번성하였음을 상기하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꼈다.

같은 날 12시경 여강에 도착하였다. 여강(아름다운 강)은 해발 2,400M로 1,000년 역사를 가진 도시로 金沙江(중국 발음은 진사강)의 옛 이름이다. 진사강은 금이 많이 나와 붙여진 이름으로 양자강의 상류에 해당되며 소수민족인 나시족(納西族, 고귀한 사람)이 주민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나시족은 운남성 북서부와 쓰촨성 서남부에 주로 거주하는 소수민족으로 인구는 32만명 정도 되고, 종교는 동파교(사마니즘의 사제를 동파라 함)로 그림문자, 경전, 제례 무용, 예술작품 등으로 독자적인 동파문화를 이루고 있었다.

과거 나시족은 모계사회로 남자는 집을 지키거나 사냥을 하였고, 여자가 일을 한 관계로 남성이 게으르다는 편견이 있었으나 이는 남자가 먼 곳으로 사냥과 물품교환 등을 위해 떠나가므로 생긴 유목민족의 특성으로 추측이 된다 .

여강시는 나시족의 성산이자 해발 5,596M인 옥룡설산 밑에 자리잡은 천혜의 요지이고, 인구 30만명에 연 관광객이 8,000만명 정도 되는 관광자원의 보고라고 한다.

일행은 여강에서 중식 후 관광버스로 세계 3대 트레킹코스 중 하나인 호도협 트레킹코스 출발점인 호도협 나시족 마을로 갔다. 나시족 원주민들 중 일부는 대지와 집이 관광 도로로 편입되어 많은 보상금을 받아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호도협 트레킹코스는 일반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옥룡설산 건너편이자 호도협 뒷산에 있는 차마고도 중 1시간30분 거리의 비교적 평탄한 구간으로 고산증, 무릎 관절 손상 등 염려 없이 가볍게 트레킹을 하였다.

트레킹 중간 중간에 원주민 할머니들이 노점상에서 사과, 수박 등을 싸게 팔고 있었다. 가난이 묻어 있는 할머니들 인상이 어릴 적 할머니를 본 듯하여 연민의 정으로 등산용 모자와 스틱을 구입한 후 과일을 팔아주기도 하였다.

트레킹코스 중 일부 도로 아래는 아찔한 낭떨러지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울퉁불퉁한 도로이므로 옛 마방들이 짐을 가득 실은 말을 몰고 안전하게 지나갔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트레킹 후 짚차로 호도협 협곡으로 갔다. 호도협은 산 아래 깊은 협곡으로 사냥꾼의 추격에 쫒기던 호랑이가 진사강 중간에 있는 보기만 해도 아찔한 바위를 밟은 후 강을 넘어갔다는 전설이 있었다.

호도협 계곡은 경사가 워낙 심해 일부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강변으로 내려갔다. 강이 급경사의 협곡을 흐르면서 바위에 부딪혀 내는 소리가 장엄한 천둥소리와 같아 진사강 물이 인생살이와 같이 큰 시련을 겪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도협 강물이 급경사 지역을 통과한 후 완만하게 흐르는 것을 보고 인생길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시족 처녀가 첫날밤을 지낸 후 남편이 마방으로 먼 곳을 가게 되자 이에 대한 한탄의 시를 지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마방을 떠날 경우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이상 집을 비울 수 밖에 없었고, 마방의 3대 위험인 험악한 지형, 물, 강도에 의해 사망할 가능성이 많아 처녀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하였을지 짐작이 갔다.

처녀가 남편에게 "첫 날 밤을 치르고 먼 길을 떠날 거면 왜 결혼을 하였나요"고 항의하자 남편이 "당신과 결혼하기 위해 빚을 많이 져 마방을 떠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처녀가 "강 건너 밭을 팔아 빚을 갚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자 남편이 말을 하지 않았다. 처녀는 "우리 집에는 벽돌도 기와도 대답을 하는데 왜 아무 말이 없으신가요"라고 하면서 구슬프게 울었다는 전설이다.

트레킹 후 나시족 마을로 돌아가 보상금으로 마련한 원주민 식당에서 특산물인 백주와 오골계 전골, 연한 상추로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식당 주인과 직원들의 모습이 옛날 사람 같았으나 표정은 모두 밝았다.

저녁식사 후 여강 고성 안에 있는 전통 가옥 호텔에 묵었다.

차마고도의 유래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었다.

먼 옛날 바깥 세상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호도협 나시족 청년은 어릴 적부터 옥룡설산 저 너머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궁금하였다. 장성한 후 홀로 옥룡설산 저 너머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으나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후 마을 청년 3명이 같은 길을 떠났으나 먼저 간 청년의 해골만 발견하였을 뿐 역시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후 여러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감으로 인하여 차마고도가 생겨났다는 전설이다.

차마고도가 생겨남으로 인해 마을 간 소통으로 인생살이 정보와 물물교환이 이루어졌고, 부족 간 결혼이 이루어지는 등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제3일 차

같은 달 19일(월요일)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오전 5시30분경 호텔 식사를 한 후 오전 6시20분경 관광버스로 출발해 오전 7시30분경 옥룡설산 입구에 도착하였다. 중간에 고산 증세에 대비하여 물약과 산소통을 구입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일행은 케이블카 1대에 8명씩 승차하여 10분 정도 후 옥룡설산(해발 5,596M)의 해발 4,000M 지점에 도착하였다.

김근종, 이경숙은 고산증세로 등반을 포기한 채 그곳에서 기다렸고, 필자와 최진석은 500M 정도 등반을 하다가 최진석의 고산 증세 심화로 내리막길을 이용하여 내려왔다. 김선공은 우리 보다 한 단계 위로 올라가다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 내려왔으며 나머지 일행들 중 일부가 정상 부근 5,000M 정도까지 등반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통상의 경우 옥룡설산은 안개와 구름이 많아 정상을 보기가 어렵다는데 우리는 정상을 여러 번 깨끗하게 잘 보았다.

옥룡설산 등반 후 남명곡으로 가 에머랄드 호수를 감상하고, 그곳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오후 2시경 옥룡설산 밑에 있는 대규모 가설극장에서 장예모 감독의 '옥룡설산 소수민족 인상여강쇼'를 관람하였다.

장예모 감독은 옥룡설산을 무대로 해발 3,050M의 고원에 가설무대를 건축한 후 16개 소수민족 단합을 위해 원주민 500명을 뽑아 장대하게 소수민족의 애환과 설화, 전통 등을 소재로 1시간 동안 배우와 관객이 하나 되어 평화를 염원하는 대형 인상여강쇼를 기획하였다.

가설극장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미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도 줄을 서 오랜 기다림 끝에 비로소 기다림을 후회하지 않는 대형 인상여강쇼를 관람할 수 있었다. 중국말로 인상여강쇼를 설명하는 바람에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없었던 점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옥룡설산과 관련해서는 나시족 처녀 총각이 성스러운 옥룡설산 밑에서 자살할 경우 다음 생애에 부부로 환생하여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나시족에는 어릴 적에 집안 어른들의 의사에 의해 장래 배우자가 결정되는 정혼 관습이 있었다. 처녀, 총각이 이생에서 인연을 맺지 못할 경우 재산을 정리하여 옥룡설산 밑 가옥에서 부부로서의 인연을 맺은 후 며칠 동안 결혼생활을 하다가 생활비가 떨어지면 함께 자살하여 내세에서의 부부 인연을 꿈꾸었다는 슬픈 전설이 었다.

같은 날 관광버스를 이용하여 4시간 걸려 저녁 7시경 상그릴라에 도착하였다.

상그릴라는 쿤룬산맥의 해발 3,500M 고산지대에 위치해 있고, 예전에는 중덴으로 불리다가 2001년경 중국 정부에 의해 상그릴라로 개명하였으며 장족자치구에 속해 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다.

상그릴라는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턴이 33세의 젊은 나이인 1933년에 쓴 작품인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충족된 평화의 이상향인 유토피아이다.

제임스 힐턴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을 나온 준재로서 '잃어버린 지평선'으로 영국의 가장 권위있는 상인 호손덴상을 받았다.

작품은 '상그릴라는 곤륜산맥 서쪽 끝자락에 있는 신비롭고 평화롭고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계곡으로 히말라야의 유토피아이고, 그곳에 사는 사람은 평균 수명을 휠씬 넘어 불사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동양에 대한 이국적인 호기심을 담고 있었다.

상그릴라 이야기는 티베트 불교에 전승되는 신비의 도시 샹바라에 기초하고 있다. 티베트어로 상그는 '북쪽에 있는', 리는 '산', 라는 '고개'의 의미이며, '마음 속의 해와 달'을 뜻한다고 한다.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여러 나라에서는 각자 자기 나라 도시가 작품 속의 상그릴라 라고 주장하였다. 권위 있는 조사위원회에서 현장 답사한 결과 중국 티베트의 중덴 마을이 빙하지대인 매리설산 부근에 있는 고원지대로서 습지가 형성되어 농사와 목축이 발달한 점, 마을 사람들이 삶에 만족하면서 평화롭게 살면서 장수 마을인 점 등을 근거로 작품 속 상그릴라로 인정하였다.

중국은 중덴을 상그릴라로 개명하였고, 상그릴라는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탈바꿈하여 세계인들의 방문 로망지가 되었다

이어서 원주민이 운영하는 한국식당에서 삼겹살과 된장찌개,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었다. 호기심에 야크고기를 2인 분 주문하였으나 너무 질겨 제대로 먹지 못하였다.

같은 날 저녁 8시20분경 상그릴라 고성(옛 마을)에 있는 한옥식 호텔에서 짐을 풀고 야경을 구경하였다. 사람들이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중국의 경기 호황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특히 광장문화가 발달하여 광장에서 8시부터 1시간 동안 원주민과 여행객들이 어울려 자연스럽게 체조와 춤을 추었고, 가게 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어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요즘에는 남의 물건을 줍거나 도둑질하는 사례가 없고, 가짜 물건을 제조, 판매할 경우 엄벌을 면할 수 없어 치안이 잘 유지되고 있다고 하였다.

중국의 엄청난 변화에 경이롭기도 하였으나 한 편으로는 경기침체, 국론분열 등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앞날이 걱정이 되었다.



제4일 차

상그릴라에서 오전 7시에 기상하여 8~9시에 식사를 하였으므로 모처럼 편안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식사 후 9시에 관광버스로 상그릴라 송찬림사 사원으로 갔고, 사원은 야산 꼭대기에 금빛나는 불법승 3개 사찰이 웅대하게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일행 모두는 송찬림사 사찰 안으로 들어가 경건하게 시주를 하고 싶었으나 김근종 교수는 무릎 관절통으로 올라가지 못하였고, 이경숙 등 3명은 추첨에 당첨된 인부를 이용하여 뒤쪽으로 올라갔다.

티베트 불교는 본교(전통 신앙), 라마교인 황교(게룩파)와 홍교가 있다. 라마교는 당나라 문선공주가 송첸캄포 토번왕에게 시집오면서 승려들을 데리고 와 전파를 하여 별개의 종파로 발전하였다.

티베트에서는 1578년경 본교의 겁박에 의해 라마교 스님들 200여명이 몽골로 탈출하였다. 소남가초 스님이 몽골 부족의 지도자인 알탄칸(몽골부족을 통일한 다얀칸의 손자)의 스승이 되어 가르침을 주었다. 알탄칸은 소남가초에게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알탄칸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 라마교를 국교로, 소남가초를 달라이 라마로 칭송하였다. 소남가초는 선대 교주들을 각각 1대, 2대 달라이 라마로 칭하였고, 알탄칸의 증손자를 4대 달라이 라마로 삼아 최초로 몽골인 달라이 라마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몽골에서는 1587년경 라마교 사원으로 '에르덴 조 사원'이 건축될 정도로 라마교가 부흥하였다.

'달라이'는 몽골어로 바다, '라마'는 티베트어로 스승을 뜻하므로 달라이 라마는 '지혜가 바다처럼 깊은 스승'이라는 의미이고, 가초 또한 티베트어로 바다라고 한다.

5대 달라이 라마는 몽골군의 도움으로 티베트를 공격하여 본교를 축출하고 티베트 종교와 정치 권력을 장악하였다.

송림찬사 사찰은 라마교 스님이 황금빛 대규모 사원으로 지었다. 한국 돈으로 시주도 받았다. 법 사찰에서는 등을 시주할 경우 염불을 해주었으므로 가이드와 함께 20위안을 주고 등 시주를 하였다. 김선공, 최진석, 한성일도 등 시주를 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사찰 답사 후 부근에 있는 전통 가옥 식당에서 빵, 꽈배기, 각종 중국요리와 야크티 등으로 푸짐하게 점심식사를 하였다.

점심식사 후 관광버스로 4시간 정도 걸려 여강에 도착하여 흑룡담을 구경한 후 근처에서 야크 전골과 연한 야크 구이 등으로 맛있는 저녁식사를 했다. 필자와 김영상 회장이 구입하여 준비한 백주 2병을 마시는 바람에 취해 블랙앤화이트 모자를 그곳에 놓고 오는 실수를 범하였다.

그 후 여행사 대표가 식당에서 보관하고 있던 모자를 가져다 주었다. 중국의 치안을 가늠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여강 고성 야경을 구경한 후 전에 머문 호텔로 이동했다.



제5일 차

같은 달 21일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오전 5시30분에 아침식사를 한 후 6시20분에 관광버스에 승차하여 7시10분에 고속열차로 곤명을 향하여 4시간 동안 여행을 하였다

점심식사는 곤명에서 유명한 쌀국수로 하였다.

쌀국수의 유래는 '이 동네에 사는 선비가 다리 건너에 있는 정자에서 과거 공부를 하는 바람에 처가 쌀국수를 만들어 가지고 가 먹도록 하였으나 국수가 불어 먹기 어렵게 되자 국수와 국물을 따로 만들어 국물에 국수를 넣어 먹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로 인하여 쌀국수의 이름은 '선 지방에서 과거 공부를 하는 선비를 위해 다리를 건너가 쌀국수를 먹게 하였다'는 의미로 과교미선이라고 불린다.

쌀국수는 큰 도자기 그릇에 들어있는 뜨거운 쌀국물에 갖은 채소와 야크 고기, 국수를 넣어 먹는 것으로 국물이 일품으로 맛있게 먹었다.

이어서 곤명 공항으로 이동하여 저녁 5시경에 동방항공에 탑승, 4시간 정도 비행하여 한국시간 밤 10시경 인천공항에 도착한 후 관광버스로 새벽 2시30경 대전 한밭수목원 남문광장 앞에 도착하여 호출 택시로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Ⅳ. 맺는 글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역사를 공부하라, 그 안에 통치학이 다 들어있다'고 말하면서 역사에 삶의 지혜가 들어있음을 강조하였다.

역사를 거울삼아 남조국이 강대국인 당나라와 유연한 외교를 하면서 내부 분열을 하지 않았다면, 대리국이 몽골과 지혜로운 외교를 펼쳤다면 나라가 멸망하는 비운만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선후배 변호사님들께 결코 후회하지 않을 차마고도 여행을 적극 권유드린다.

정교순 법무법인 유앤아이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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