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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여행] 120-양주 회암사지(檜巖寺祉)와 '덕계리육회방앗간'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최화진 기자

최화진 기자

  • 승인 2026-08-19 23:23

신문게재 2026-08-19 9면

경기도 양주시는 고려와 조선 시대 왕실의 후원을 받았던 회암사지를 품은 역사적 요충지이자, 최근 신도시 개발로 젊은 층이 유입되며 미식 문화가 활발히 발달한 도시입니다. 특히 덕계동의 '덕계리육회방앗간'은 매장에서 직접 짠 신선한 기름과 숙성된 암소 한우를 사용하여 육회와 들기름 막국수 등 재료 본연의 풍미를 극대화한 메뉴를 선보입니다. 이곳은 역사적 정취와 현대적인 감각의 맛이 공존하는 양주의 대표적인 명소로, 깊은 육향과 고소한 맛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훌륭한 미식 경험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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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회와 육사시미./사진=김영복연구가 제공
이번 '맛있는 여행'은 북쪽 소요산에서 남으로 도봉산과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에서 떨어져 나온 낙맥의 하나인 불곡산(佛谷山)과 도락산(道樂山), 칠봉산(七峰山), 천보산(天寶山)의 산줄기가 감싸안아 전형적인 내륙 분지형으로 되어 있는 양주시(楊州市)로 향했다.

신라 때 양주(楊州)는 경주에서 평양으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고려 태조 23년(940년) 한양군 현 서울 강북 일부를 양주로 개칭하고, 태조 4년 을해(1395) 6월 6일 한양부(漢陽府)를 고쳐서 한성부(漢城府)라 하고, 아전들과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楊州郡)이라 고쳤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특히 바위봉과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천보산(天寶山)은 양주시 회암동의 회암사(檜巖寺)와 양주 회암사지(檜巖寺祉)를 중턱에 품고 있다.



회암사지(檜巖寺祉)는 고려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總本山)이었으며, 조선 초에 불교계를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폐합(統廢合)할 때에도 선종(禪宗) 본찰(本刹)로써 크게 번영하였다.회암사(檜巖寺)는 정확하게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에 '1174년(명종(明宗 4) 금(金)나라의 사신이 회암사(檜巖寺)를 다녀갔다.' 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 그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고려(高麗) 충선왕(忠宣王5년) 1313년에는 선승 태고(太古) 보우(普遇, 1301~1382)가 이 절에서 대선사(大禪師) 광지(廣智)에게 출가했다.

충혜왕(忠惠王 5년)1344년에 속명(俗名)이 아원혜(牙元惠)인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가 회암사(檜巖寺)에서 수도하던 중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회암사(檜巖寺)가 현재와 같이 거대한 규모로 중창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려 말~조선 초에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많은 불사가 이루어졌고,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던 고승들이 머물던 최고의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고려 말인 1372년(공민왕 21)에는 나옹(懶翁)이 공민왕의 명으로 회암사(檜巖寺)에 와서 원(元)나라 때의 인도 고승(高僧) 지공(指空)의 사리탑을 건립하였고, 1374년(공민왕 23)부터 2년 동안 266칸의 대규모 중흥 불사를 벌여 1376년(우왕 2) 나옹(懶翁)의 제자 각전(覺田)이 완공하였다.조선시대에 들어서 유신(儒臣)들의 거센 발발 속에서도 회암사는 왕실의 원찰로 그 자리를 지켰는데, 태조 이성계는 자초에게 계를 받고 회암사에 수도 생활을 했으며, 고려 문신이며 학자인 최자(崔滋, 1188~1260)는『보한집(補閑集)』에서 회암사에 원경국사(圓鏡國師)의 글씨가 남아 있다는 언급이 있다.

이색(李穡 1328~1396)의『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는 "회암사는 승려 3,000여 명이 머무르는 대사찰로 건물은 모두 262칸이며, 높이 15척[4.55m]의 불상 7구와 10척[3.03m]의 관음상이 봉안되었으며, 건물들은 크고 웅장하며 아름답고 화려하기가 동국(東國) 제일(第一)로 중국에서도 찾기 힘들 정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회암사(檜巖寺)가 얼마나 웅대하고 화려하였는지를 잘 말해 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태조 2년(1393) 1월 21일자를 보면 '회암사(檜巖寺)를 지나면서 왕사(王師) 자초(自超)를 청하여 같이 갔다.고 나온다.'

자초(自超)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선종 승려로 지공(指空)과 나옹 혜근(懶翁惠勤)의 법맥을 이은 무학대사(無學大師)이다.

태조 이성계는 1393년 무학 자초(無學 自招)를 회암사에 머물게 하고, 불사와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7번이나 회암사를 다녀갔다.

그리고 왕위를 태종에게 물려 주고 소요산에서 회암사(檜巖寺)로 행차하였다. 태상왕이 회암사를 중수(重修)하고, 또 궁실(宮室)을 지어 머물러 살려고 하니, 임금이 그 뜻을 어기기가 어려워서 대부(隊副) 1백 50명을 보내어 부역(赴役)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태종 2년 (1402) 6월 9일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 쓴『회암사중창기(檜巖寺重創記)』에 의하면 성종 3년에 정희왕후(세조의 비)가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명종 때에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는 보우(普雨)를 통해서 불교 중흥책을 펼치면서 회암사를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크게 일으켰다.

회암사지는 전체 70여 개의 건물지에서 35개소 이상에서 다양한 형태의 구들이 발견되어 국내 최대의 온돌 유적이기도 하다. 회암사 건물지 가운데 온돌이 설치되었던 곳은 방장(方丈), 승당(僧堂), 영당(影堂), 료(療), 객실, 그 외 용도가 명확하지 않은 건물지들이다. 회암사지 온돌 유적은 실내 일부에만 설치되던 것이 전체 온돌로 정착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회암사는 명종대까지는 사찰이 유지되었으나 이후 절이 불에 타 폐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기는 불명확하지만, 보우가 유배당한 뒤 혹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탔을 가능성이 높다. 임진왜란 중인 (선조 28) 1595년 6월 화포를 만들 철이 부족하게 되자 회암사터에 있던 종을 녹여 화포를 주조하였는데, (선조 28년) 1595년 6월 4일,(선조 29년) 1596년 1월 28일, 이때 회암사 종으로 화포를 만들자는 군기시(軍器寺)의 보고에서 옛터에 있는 종 역시 불에 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임진왜란 후 회암사(檜巖寺) 중창 공사가 진행되어 1605년(선조 38) 선왕(先王)의 위패를 모신 어실(御室)을 조성하였고, (선조 38년) 1605년 6월 5일, (인조 4) 1626년 에는 항산군(恒山君) 이정(李楨)이 시주가 되어 회암사에서 불사(佛事)를 크게 벌인 것이 문제가 되어 파직되기도 하였다[(인조 4년)1626년 윤6월 20일, (인조 29년) 1651년 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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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사진=김영복연구가
회암사(檜巖寺)는 폐사(廢寺)되어 지금은 회암사지(檜巖寺祉)만 남아 있다.

다만 회암사지(檜巖寺祉)에서 약 0.6km를 가면 천보산(天寶山) 중턱에 또 다른 회암사(檜巖寺)가 있다.

옛 회암사의 보물로 지정된 회암사지 사리탑과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 무학대사탑인 삼대화상(三大和尙)의 묘탑(廟塔)을 지키기 위해 (순조 28)1828년에 작은 암자로 시작하여 1922년 봉선사(奉先寺) 주지였던 월초화상(月初和尙1858년~1934년)이 새로 보전(寶殿)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삼대화상의 진영을 모셨다. 이후 1977년 호선대사가 큰 법당을 지어 가람을 중창한 이래 현재까지 옛 회암사(檜巖寺)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회암사지(檜巖寺祉)와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사이 넓은 잔디공원은 휴일에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양주는 2026년 7월 현재 경기도 양주시 인구수는 297,352명으로 서울 강북 지역의 젊은 층들이 양주시의 신도시로 많이 이주하고 있어, 인구 증가율 1위 도시로 경기 북부에서 가장 젊은 도시 중 한 곳이다.

그러다 보니 양주시는 젊은이들이 찾는 맛집 먹거리 타운이 잘 형성되어 있다.

양주 옥정 덕정·고읍 근처에서 접근하기 좋은 지역 먹거리 골목으로 양주 엄상마을 음식 문화거리가 있고. 양주골한우마을 등이 있다.

그러나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도덕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하여 붙여진 도덕리(道德里)의 덕(德) 자와 조선 중종(中宗) 때의 문신인 돈계(遯溪) 박율(朴栗 1520~1593)의 호에서 따온 돈계리(遯溪里)에서'계(溪)'자를 따 덕계리(德溪里)로 불리던 덕계동(德溪洞)의 맛집을 찾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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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덕계리육회방앗간./사진=김영복연구가
덕계동(德溪洞)은 서울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양주역(楊州驛) 다음 역에서 내리면 된다.

이 덕계동(德溪洞)에 아파트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맛집들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경기 양주시 평화로1489번길 12에 위치한'덕계리육회방앗간(전화 0507-1456-4844)'이 필자가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는 맛집이다.

이 집에 들어서면 우선 제일 먼저 착유기(搾油器)가 눈에 띄며 음식을 먹지 않아도 고소한 냄새가 나는 듯하다.

이 집의 대표적인 메뉴는 육회비빔밥, 들기름 막국수, 등이 있으나 육회(肉膾)를 좋아하는 필자는 이 집의 베스트(Best) 메뉴라 하는 '육회+육사시미 반반'과 '들기름 막국수'를 시켰다.

메뉴가 나오자마자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특히 이집은 암소고기만 쓴다고 한다.

쇠고기는 보통 한우의 성별과 생리 상태에 따라 고기의 맛과 육질이 다르게 느껴진다.

보통 암소고기 하면 송아지를 낳은 적 있는 암컷 소를 말하고 체형 작고 지방 분포가 일정하다. 그러나 거세우는 수컷 소를 생후 6개월 전후로 거세한 소인데, 근육 발달 좋고, 마블링 뛰어나다.

국내 한우 시장에서 1++ 등급 이상 고급육의 상당수는 거세우가 차지하고 있으며, 암소는 균일한 육색과 은은한 풍미를 가진 고기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 육회 감으로는 암소가 좋은데, 암소는 설도, 우둔, 채끝이 인기가 많다. 암소는 풍미가 깊은 대신 질감이 단단할 수 있어 숙성육을 선택하면 만족도가 높아진다.

'숙성'이란 쇠고기를 냉장 온도에서 일정 기간 보관해 맛을 좋게 하는 기술이다. 쇠고기의 숙성방식은 크게 건식 숙성과 습식 숙성으로 나뉜다. 습식 숙성은 쇠고기를 진공 포장해 냉장 온도(0~4℃)에서 1주일 이상 숙성하는 방식으로 최대 9주까지 숙성하기도 한다.

한우 1등급 등심을 4도에서 14일 숙성했을 때 근육 내 단백질 분해 효소가 활성화돼 고기의 연한 정도를 나타내는 전단력 수치가 약 50% 정도 낮아져 훨씬 부드러워졌다. 또한, 감칠맛을 내는 유리아미노산(글루탐산) 함량은 3배 정도 높아진다.

다만 육회의 경우 숙성하면 육질이 부드러워지고 육향이 깊어질 수 있지만, 육회· 육사시미는 신선도가 핵심이라 당일 섭취를 해야 한다.

1919년 심환진(沈晥鎭 1872~1951)이 상주군수로 부임하였을 당시 19세기 상주 지역 반가의 봉제사 접빈객 음식과 조리 방법이 기록된 요리책을 옮겨 적어 둔 한글 필사본인 작자 미상의『시의전서(是議全書)』에 소개된 육회 조리법은 다음과 같다. "쇠고기는 기름기 없는 연한 살로 얇게 저며서 가늘게 썰어 물에 담가 피를 잠깐 뺀 후 베보자기에 잘 짜서 파와 마늘을 다져 (넣고) 후춧가루와 깨소금, 기름, 꿀을 섞어 잘 주물러 잰다. 잣가루를 많이 섞고 깨소금이 많이 들면 맛이 탁하다. 기름은 많이 치고 후추와 꿀을 섞어 윤즙은 식성대로 하라. 잡회는 콩팥, 처녑, 곁간, 양지머리로 잰다. 소금 기름에 재는 잡회는 후춧가루, 기름소금에 주물러 쓰고 또는 깨소금 약간 넣는다(단 처녑회는 갸름하게 썰어 가장자리로 실백 자 하나씩 물려 말아서 담아 쓴다)."라고 하였다.

'덕계리육회방앗간'의 베스트(Best) 메뉴'육회+육사시미 반반'육회와 육사시미 사이에 한입에 입안에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주먹밥과 배채, 미나리 줄기가 놓여 있다.

시의전서에는 깨소금이 많이 들면 맛이 탁하다 하여 잣가루를 썼다고 하지만 이 집은 육회 위에 깨소금을 뿌려 놨다.

다만 이 집의 육회를 입에 넣으니 우선 육향(肉香)과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함께 부드러운 맛이 입안을 호사스럽게 한다. 필자는 잣가루를 넣은 육회는 못 먹어 봤지만 깨소금도 괜찮다.

육회와 같이 나오는 육사시미도 맛이 깔끔하고 식감이 부드러워 좋았다.

다만 육사시미(肉刺身·肉さしみ)라는 근본도 없는 이름을 쓰는 게 식생활을 연구하는 필자로서는 못마땅하다.

18세기에 비로소 육식을 시작한 일본에선 아예 육회를'유케(ユッケ)'란 이름으로 팔릴 정도인데, 우리는 오히려 육사시미(肉刺身·肉さしみ) 라는 합성어를 쓰고 있다.

사실 이름에 '사시미(さしみ)'가 들어가지만 일본 요리가 아니라 한국에서 통용되는 명칭일 뿐이다.

육사시미(肉刺身)보다 오히려 납작하게 썬 육회인 편육회(片肉膾)라고 하는 것을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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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기름막국수./사진=김영복연구가
'들기름막국수'는 100% 메밀로 만든 면이라 건강한 느낌이 든다.'육회+육사시미 반반'을 먹느라 약간 늦게 먹었는데도 면이 불지 않았다. 들기름의 고소함이 과장된 표현이라 할지 몰라도 환상적이다.

매장에서 직접 짠 신선한 들기름의 고소함이 면 하나하나에 잘 스며들어 있다.

사실 이 집은 재방문인데, 지난번 이 집을 방문했을 때는 '육회비빔밥'을 먹었었다. 이 집 '육회비빔밥'은 고추장이 들어가지 않고, 참기름 + 맛간장 소스로만 간을 해서, 재료 본연의 맛이 확 살아나고, 신선한 한우 암소 육회가 듬뿍 들어가 잘 어우러져 있다.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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