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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화추동] 삶은 자름선(切取線)으로 그려내는 풍경화

김충일 북-칼럼리스트

이현제 기자

이현제 기자

  • 승인 2026-09-15 16:20

신문게재 2026-09-1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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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일 북-칼럼리스트
그렇게 '온 우주'를 달구던 열기는 짙은 초록의 플라타너스 속에 간간이 누런 잎을 만들어내면서 어디로 가버렸나. 차가운 바람이 옷섶 사이로 그리운 사람의 잔상을 안고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안부는 묻지만, 응답을 머뭇거리게 하는 다종의 전자메일.

우편함을 채우는 가을맞이 행사를 비롯한 다정한 만남의 소리와 흔적이 묻어있는 '초대장'이 그것. 그들은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일상이란 구멍 속으로, 실용과 감정의 말들이 뒤섞인 '삶의 선형(線型)'이 되어 들어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생성의 결과 동선으로 얽혀있는 것처럼 초대장 위에는 다른 빛깔의 인연을 맺은 선(線)이 그려진다. 눈에 띄는 것은 초대장의 겉면과 내용, 혹은 텍스트의 구획을 갈라놓는 사회적 예의와 명확한 거리를 상징하는 '실선(實線)', 마땅히 채워져야 할 여백에 위태로운 여지를 남기면서 끊어질 듯 연결되는 마음의 여백을 상징하는 '점선(點線)', 게다가 참석의 승낙여부를 묻는 난(欄)위에 가느다란 구멍들이 촘촘히 뚫려 있어 힘을 주면 찢어질 듯 그어진 '자름선(切取線)'이 그것이다.

그렇게 오랜 친구가 보내온 초대장에는 실선이 아닌 점선의 자름선이 함께 자리할지를 물으며 잘라내기를 청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네 '삶'은 자름선이 그어져 있는 초대 편지가 아닐까? 일상의 자름선은 늘 예고 없이 작동한다.



오랫동안 잘 지내던 친구와 아주 사소한 오해와 실수로 마음의 거리가 생길 때, 늘 곁에 있을 것만 같던 부모님의 얼굴에서 짙어진 검버섯과 두터워진 주름을 문득 발견하고 가슴이 철렁할 때, 혹은 매일 반복되던 출퇴근길의 친숙한 풍경이 어떤 계기로 아주 생경하게 다가올 때, 우리는 단단하다고 믿었던 일상에 점선 모양의 균열이 갔음을 깨닫게 된다.

삶이라는 비유로 다시 곱씹는다. 닿을 듯 닿지 않는 점선, 그 빈틈으로 빠져드는 아득함, 순간의 방심으로도 심연에 도달할 것 같은 위태로운 징검다리의 삶이 그려진다. 그 점선은 아프고 쓸쓸하다. 사실 촘촘하게 연결된 줄 알았던 삶이 수많은 구멍과 틈새로 겨우 이어져 있었음을 직시하고 되새김질하는 일은 고통스럽기 까지 하다. 잘라내기 전의 자름선은 온전한 하나처럼 보이지만, 작은 힘만 가해져도 "스르륵" 소리를 내며 갈라설 준비를 마친 상태로 이어진다. 우리가 타인과 나누는 따뜻한 온기, 사랑하는 이와 맺은 굳건한 약속조차도 그 이면에는 언젠가 찢겨 나갈 '불안한 온전함'이 틈새에 품고 있음을 지시해 준다.

그러나 자름선은 비극적인 '끊어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름선이 있기에 삶은 비로소 자기 몸의 일부를 떼어내어 목적한 곳으로 보낼 수 있다. 삶의 어느 한 부분이 잘려 나가는 아픔을 겪어야만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가족의 얽매임이란 그늘을 지우고 둥지를 떠나는 독립의 순간이 그러하고, 오래 묵은 과거의 상처와 이별하고 새로운 자신을 마주하는 용기가 그러하다. 하여 일상의 풍경에 다양한 색깔로 그려진 자름선 앞에서 느끼는 찰나의 서러움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아직 찢어지지 않은 순간의 온기를 온전히 누려야 한다는 나지막한 당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이라는 얇고 바스락거리는 종이 위에 저마다의 자름선을 그으며 살아가고 있다. 지나간 어제를 기꺼이 뜯어내어 시간의 저편으로 흘려보내고, 마주할 내일을 향해 가볍게 몸을 돌리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점선을 새긴다. 먼 훗날 뜯겨 나간 자리에 남을 쓰라림을 가만히 보듬어보자. 그리고 그 잘라진 가장자리에 남아 있는 거친 질감이야말로, 우리가 아픔을 무릅쓰고 온몸으로 삶을 살아냈다는 가장 확실하고도 아름다운 증거다. 오늘, 청량하게 찾아온 가을밤의 별자리에 자름선을 그려보자. 여기까지의 점선이 하나의 세계였다면, 이제부터 시작되는 점선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또 다른 세계를 가꾸어 가야 할 '오늘 여기의 자름선'이다./김충일 북-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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