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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시평] 가을을 닮은 영화, 가을과 맞닿은 음악

최현숙 한국침례신학대학 기획처장

고미선 기자

고미선 기자

  • 승인 2026-09-15 16:19

신문게재 2026-09-16 18면

최현숙 침신대 사무처장
최현숙 침신대 기획처장
끝날 것 같지 않던 여름도 그런 치열한 열기가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가을은 예고도 없이 성큼 우리 곁에 다가왔다. 파란 물감에 흰 구름을 풀어 놓은 듯한 하늘과 제법 선선한 바람은 영화 한 편, 음악 한 곡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만들어 주는 계절이다.

문득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뉴욕의 가을이 떠오르며 동시에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 1857-1934)의 첼로 협주곡 E 단조의 선율이 생각난다. 물론 엘가의 음악이 영화에서 사용되지 않았지만, 두 작품은 묘하게 비슷한 감성을 공유한다. 조안 첸 감독의 작품인 《뉴욕의 가을》은 삶이 공허하여 이성과 가벼운 만남만을 고집하는 지극히 나르시스작인 중년의 한 남자와 심장병으로 시한부 삶을 사는 젊은 여인이 낙엽이 지는 뉴욕의 센트럴파크에서 만나 사랑하게 되는 상투성이 있는 이야기다. 표면적인 서사만 보면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영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을이 깊어 갈수록 그들의 사랑도 성숙해지는 감정선을 낙엽 가득한 가을 풍경과 함께 그려낸 영상미는 인상 깊은 여운을 남겨 준다.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을 배제할 수 없는 한계성을 품고 있는 그들의 사랑은 생명의 찬란한 결실을 보여주는 계절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머지않아 찾아올 차가운 겨울을 예감케 하는 소멸의 시간인 가을과 절묘하게 닮아있다. 영화 속의 센트럴파크와 그 길에 가득한 낙엽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게 화면을 채우지만, 그 화려한 색채는 곧 스러질 나뭇잎의 마지막 정념이자 고별인사인 것 같아 마음이 아려오기도 한다.

이 영화의 슬프도록 우아한 분위기와 완벽히 맞물리는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1919년에 작곡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상황을 목도한 엘가가 자신의 건강 악화와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직면하며 써 내려간 생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인 첼로 협주곡은 가슴 깊은 곳까지 울리는 첼로의 진중한 선율로 스러져가는 모든 것들에 바치는 따뜻한 위로이자 비가라고 할 수 있다. 어떠한 서주도 없이 첼로 솔로가 연주하는 묵직한 첫 선율은 듣는 이의 마음에 큰 파장으로 울려 퍼진다. 낮고 침울하지만 깊이 있는 첼로의 음색이 마치 찬 바람에 떨고 있는 쓸쓸한 나뭇가지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비극을 향한 분노나 경박한 슬픔을 쏟아내지 않는다. 대신 삶이 주는 모든 것을 살아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수용과 회한, 그리고 묵직한 고독의 가치를 농밀하게 표현한다. 1악장과 3악장에서 첼로의 소리는 마치 영화 주인공들의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내면의 탄식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것은 마치 삶의 황혼기에 다다른 엘가가 첼로 현 위에 담아낸 품격 있는 서정이, 인생의 절정에서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여주인공과 그녀를 통해 뒤늦게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배운 남주인공의 비극적 사랑을 거울처럼 비춰준다.

《뉴욕의 가을》과 엘가의 음악이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일시적인 '슬픔'이나 '감상'이 아니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것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나뭇잎은 나뭇잎으로 떨어지고, 가을볕은 금세 기울며, 사랑하는 사람은 언젠가 우리의 곁을 떠난다. 그러나 우리는 가을 낙엽의 짧은 허망함보다 그 찬란했던 색을 오래 기억하듯이 영원하지 않지만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소중한 선물로 가슴에 담아 두어야 한다. "이 계절은 너무 짧아, 마치 우리의 시간처럼" "하지만 그렇기에 더 찬란하잖아요" 영화 속 두 주인공이 센트럴파크를 거닐며 나누는 대화다. 짧아서 더 찬란해야만 하는 계절, 이 가을에 영화를 통해 낙엽 가득한 센트럴파크를 거닐어보기도 하고 생의 마지막을 위대한 작품으로 완성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듣는다면 우리의 가을도 결국 스러져가기에 더욱 아름다울 수 있을 것 같다. 주변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복잡해 지지만 한 편의 영화, 한 가닥의 음악으로 마음을 채워보면 어떨까? 지나가는 가을도, 스러져간 사랑도, 결국 우리 삶을 한층 더 깊고 아름답게 물들여준 고마운 선물이었음에 감사하면서.



/최현숙 한국침례신학대학 기획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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