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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신화 읽기] 제29장-안산동 산성의 여장수

한소민/배재대 강사, 지역문화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

고미선 기자

고미선 기자

  • 승인 2026-11-05 16:59

신문게재 2026-11-05 8면

대전 성재산 안산동 산성에는 백제 멸망 당시 전사한 남편을 대신해 신라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용맹한 여장수의 전설이 전해집니다. 이와 함께 남동생과 성 쌓기 내기를 벌이다 어머니의 편애와 방해로 인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힘 센 누이의 이야기도 이곳에 깃들어 있습니다. 두 전설 속 여성들은 모두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한계와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공통된 안타까움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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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녘 뒤로 보이는 길마재산 사진=한소민 소장
대전시 유성구 안산동의 성재산은 해발 226m의 나지막한 산입니다. 정상부에는 백제 시대에 쌓은 것으로 알려진 안산동 산성이 남아 있는데 공주에서는 송곡리산성으로 옛 연기군에서는 용담리산성이라고도 불렸지요.

산성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어두니마을이 있습니다. 산골이 깊어 해가 일찍 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이야기와 '구름에서 물고기를 얻었다'는 뜻의 '어득운리(魚得雲里)'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집니다. 길마재산을 지나 산길을 오르면 오래된 성벽의 흔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백제가 멸망하던 시기, 남편의 뒤를 이어 전장에 나섰던 한 여장수의 전설이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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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니마을 표지석과 안산동 산성 표지판 사진=한소민 소장
전설은 백제가 멸망하던 66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계족산성 부근의 성을 지키던 백제 장수가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하자, 그의 아내가 남편의 뒤를 이어 전장에 나섰습니다. 평소 말을 타고 산을 누비며 사냥을 즐겼던 그녀는 활쏘기와 승마에 능숙한 여장부였습니다. 남편의 원수를 갚고 나라를 지키겠다며 마을 사람들을 모아 싸움을 준비했지요. 그러나 신라의 대군과 정면으로 맞서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녀는 성재산으로 물러나 성을 쌓고 군사를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홀로 말을 타고 적진 가까이 다가가 화살을 쏜 뒤, 뒤쫓아 오는 신라군을 산속으로 유인했습니다. 산세를 이용한 기습공격으로 적을 괴롭혔고, 신라군 장수의 눈을 화살로 맞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수적으로 열세였던 백제군은 끝내 무너졌습니다. 여장수 역시 말을 타고 적진으로 달려 나가 마지막까지 싸우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성재산 어디선가 죽은 두 부부가 서로를 애타게 찾는 소리가 들린다고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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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동 산성 사진=한소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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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동 산성 잔존 성벽 사진=한소민 소장
그리스 신화에도 용맹한 여성 전사가 등장합니다. 아마존의 여왕 펜테실레이아입니다. 그녀는 전쟁에 능한 여성 전사 집단인 아마존을 이끌고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트로이군을 도와 그리스군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싸우다가 전장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점에서 성재산 여장수와 닮았습니다.



중국에도 가족을 위해 전쟁터에 나선 여성 영웅이 있습니다. 영화 《뮬란》으로 널리 알려진 화목란입니다. 그녀는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 남장을 하고 군대에 들어갑니다. 오랜 전쟁을 마친 뒤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함께 싸운 동료들은 그제야 그녀가 여성임을 알고 놀랍니다. 성재산 여장수가 죽은 남편을 대신해 전쟁에 나섰다면 화목란은 늙으신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에 나선 것이지요. 두 사람 모두 가족을 위해 전장에 나섰지만 그 운명은 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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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동 산성 전설을 소개하는 표지판 사진=한소민 소장
그런데 안산동 산성에는 또 다른 여성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앞서 소개한 월평산성전설(대전에서 신화 읽기 제8장)처럼 이곳에도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이 남아 있지요. 누이는 성을 쌓고 남동생은 송아지를 몰고 한양에 다녀오는 내기를 벌입니다. 누이가 성을 거의 완성하자 아들의 패배를 걱정한 어머니가 딸에게 뜨거운 팥죽을 먹이며 시간을 끌게 하지요. 결국 누이는 내기에서 지고 목숨까지 잃게 됩니다.

안산동 산성에 전해지는 두 전설에는 남다른 능력을 지닌 여성이 등장하지만, 모두 비극적인 결말을 맞습니다. 여장수는 뛰어난 무예와 지략으로 군사를 이끌었지만 나라가 무너지는 전쟁 속에서 목숨을 잃었고, 누이는 혼자 성을 쌓을 만큼 힘이 셌지만 아들을 우선한 어머니의 선택으로 희생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나라를 지키려다 죽었고, 다른 한 사람은 가족 간의 내기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연은 다르지만 두 여성 모두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도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남깁니다.



그로부터 천 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 두 여성의 이야기는 여전히 성재산에 남아 있습니다. 성을 쌓던 누이는 정말 어머니가 건넨 뜨거운 팥죽 때문에 내기에 졌을까요? 비 오는 날이면 서로를 애타게 찾는다는 여장수 부부는 그 오랜 세월 어디선가 다시 만났을까요? 무너진 성벽 앞에 발걸음 멈추고 아득한 세월 속에 묻힌 두 여인의 사연을 떠올려 봅니다. 성벽의 돌들은 그 모든 일들을 다 알고 있으련만, 아무런 말이 없네요.

한소민/배재대 강사, 지역문화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

한소민-최종
한소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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