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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디세이] 혐오표현심의위원회의 고뇌, 반의 반 걸음이라도 조금씩 함께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심효준 기자

심효준 기자

  • 승인 2024-06-03 10:35

신문게재 2024-06-04 18면

이승선 교수
이승선 교수.
1778년.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가 죽었다.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말할 권리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말로도 유명하다. 그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 그의 전기를 쓰던 영국 작가 홀의 작품에 나오는 표현이라고 한다. 그래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웅변하는 데 손색이 없다. 그렇다면 어떤 표현이든 내용과 관계없이 모두 보호돼야 하는가. 목소리 크고 거친 다수 중의 누군가가 소수를 향해 폭력을 행사하자는 선동도 표현의 자유로 보호받아야 하는가.

1859년. 영국의 사상가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을 펴냈다. 밀은 책에서 소수의견의 소중함을 역설했다. 생각이 다른 한 사람의 표현이 어쩌면 진리일 가능성, 비록 그의 주장이 진리가 아니더라도 한 알의 진리가 배어 있을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또 소수의견에 의해 비판을 받거나 성찰되지 못한 다수의견은 딱딱한 편견 덩어리로 고착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밀은 국가권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다수도 개인의 양심과 사상,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계했다.

1878년.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발간됐다. 제3권 후반부에 러시아 용병의 세르비아 전쟁 참여 부분이 있다. 전쟁참전 경험이 있는 소설속 노인은 용병들의 실상과 전쟁의 참상을 알지만, 대화 상대방에게조차 그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다. 당대의 사회 분위기에서 일반적인 견해에 대립된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특히 군인 문제를 비판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소수는 쉽게 말하지 못하고, 말할 수 없으므로 소수의견은 공론의 장에 제대로 진입하기도 어렵다.



1974년. 독일의 언론학자 노엘레 노이만은 '침묵의 나선이론'을 발표했다. 다수의 여론과 자기의 의견이 서로 다르다고 인식할 경우 사람들은 고립의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지 않고 침묵한다는 것이다. 개인이 다수의 여론을 인식하는 안테나는 언론이다. 언제 어디서나 언론보도가 넘쳐나고 다수 언론이 동일한 관점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쏟아내기 때문이다.

2024년.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 약칭 KISO가 '동그란 네모'를 그리라는 사회적 책무 요청을 회피하지 않고 고뇌를 담은 답을 내놨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가장 성공적인 자율규제 모델로 KISO를 꼽는다. 사업자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재정면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 정책위원회를 비롯한 각종 활동은 외부 전문가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간다. 인터넷 공간이 이용자들의 사상과 의견이 자유롭게 표현되면서 동시에 지식과 정보의 공유, 토론과 논쟁의 생산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이끌기 위해서다. KISO는 2022년 초 혐오표현심의위원회를 발족했다.

혐오표현심의위에는 일곱명의 외부 전문가를 비롯한 내외부 연구자 15명이 참여했다. '혐오표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열다섯 명은 열 다섯 개의 답을 내놓은 것으로 보였다. 표현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면서도, 혐오표현으로 인한 폐해를 최대한 줄여보는 데 도움이 되도록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2년여 간 스무차례 이상의 회의를 열고 혐오표현의 정의를 세웠다. 실제 사례에 적용해 개념과 현실의 간극을 좁히는 토론을 거듭했다. 국내외 미디어 플롯폼에서 혐오표현물을 담당하는 실무자들을 초치해 그들의 운영 기준과 현황을 청취하고 가이드라인에 반영했다.

엊그제 5월 말, KISO의 혐오표현심의위원회는 이용자와 회원사가 요청한 특정 표현물의 혐오표현 여부에 대한 심의결정을 공개했다. 사람마다 각자 혐오표현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다를 수 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이든 소수의 의견이든 혐오표현에 대한 각자의 정의는 존중되어야 한다. 부디 사회적으로 소수라는 이유로 또는 특정한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혐오스러운 표현으로 공격을 받거나 폭력의 행사를 선전, 선동하는 혐오표현의 희생자가 되는 일이 반의반만큼이라도 줄어들 수 있기를 소망한다. 생각이나 속성이 다르더라도 온라인 표현의 공간에서 조금씩 함께 더불어 걸어가는 데, 시민들이 침묵의 나선으로 침잠해 버리지 않도록 기성 언론도 관심을 갖고 동참해 주기를 기대한다.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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