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 남종면의 물안개 공원과 귀여섬은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명소이며, 인근 분원리는 조선 시대 왕실 도자기를 생산하던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곳입니다.
필자는 가족과 함께 이곳을 산책하며 자연의 여유를 만끽하고, 조선 백자의 발자취가 담긴 분원리 일대의 유서 깊은 도자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여정의 마무리로 퇴촌면의 유명 식당에서 불고기를 즐기며 조선 시대 난로회의 전통과 현대의 맛이 어우러진 뜻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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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어섬 (사진=김영복 연구가) |
이곳은 원래 귀여리(歸歟里)에 있어 귀여섬[歸歟島]으로 불려왔다.
귀여리(歸歟里)라는 지명은 조선 중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대사간과 예조 참판을 지내고 권력에 결탁하지 않은 선비정신을 가진 한승정(韓承貞 1478년~1534년)이 훗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남석재에 귀여정(歸歟亭)이란 정자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고 하여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귀여리로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이곳은 토마토와 팔당호로 유명한 광주 퇴촌면에서 양평 방면으로 내려가 보면 자주 물안개가 피어올라 그러한 아름다운 이름을 갖게 된 광주 물안개 공원이 있다. 광주 팔당호에서 양평 두물머리로 이어지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이기도 하다.
강가의 산책로와 자전거길을 따라 다양한 들꽃과 새소리를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쉼터다.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면, 누구나 잠시 일상을 잊고 자연에 빠져드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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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당물안개공원 (사진=김영복 연구가) |
특히 물안개공원과 귀여섬[歸歟島] 주변에는 자연적으로 자생하는 연꽃을 비롯한 애기부들물옥잠. 가시연꽃, 마름 등이 마치 생태공원처럼 장관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물안개공원과 귀여섬에는 가을이면 길을 따라 코스모스들이 한가득 피어나 코스모스 명소로도 유명한데, 자전거길과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2인용 자전거, 3인용 자전거 등 취향에 맞게 골라 빌릴 수 있는 자전거 대여소가 있어 연인이나 친구들끼리 자전거를 타고 주변 경치를 즐길 수가 있다.
필자 일행은 이날 찾지는 않았지만, 만약 시간이 허락된다면 가까운 남종면 분원리(分院里)를 들려도 좋을 것 같다.
조선조 시대 궁중에서 쓰는 사기그릇을 관장하던 사옹원(司甕院)의 현지 제작소가 있던 곳으로서 분점이란 뜻에서 분원이라 불렸다. 영조시대에는 분루원이라고도 불렀다. 이곳에는 옹기 및 사기를 구워 파는 시장이 오랫동안 번창하였으나 을축년 대홍수 이후에는 쇠퇴하였으나 광주 분원(分院)하면 지금도 사기(司器)그릇을 연상하는 곳이다.
이곳은 사적 314호 조선백자 분원 도요지의 가마터가 있는 곳이다.
조선 말기인 고종(高宗) 때 궁궐과 관청에 각종 그릇을 납품했던 공인(貢人)이자 번자 회사의 운영자였던 지규식(池圭植 1851~?)은 1891년부터 1911년까지 약 20년 7개월간 (7498일)이곳 경기도 양근군(楊根郡, 현 : 광주군) 남종면(南終面) 분원리(分院里)에 거주하며 분원 공소의 공인으로 일하며 일기를 써 『하재일기(荷齋日記)』를 후대에 남겼다.
분원(分院)은 사옹원(司甕院)의 하급 기관이다.
광주는 사옹원의 분원지(分院地)로 왕실 어기(御器)만을 제작하도록 특별히 지정되었던 곳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사옹원의 분원 사기장이 380명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인조 3년 7월의 기록에는 2명씩 봉족이 있어 총 1천140명이 어기(御器) 만들기에 참여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경기 충청 경상 전라도 등의 사기장이 모두 99명에 불과했던 점으로 보아 광주분원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광주목 토산조에 따르면 사옹원의 관리가 화원을 대동하고 분원에 내려가 어기에 시문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성종 2년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는 사옹원의 관리가 서리를 이끌고 가서 봄에서 가을까지 감독 번조해 어부에 수납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숙종 때 태어나 영조 때 주로 활동한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우천도(牛川圖)」를 보면, 지금의 남종면 분원리, 우천리 일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있는데 이 그림은 강 주변에 도자기 관요와 사기장의 집들이 잘 나타나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분원은 관용자기와 왕실용 어기번조를 소관하던 사옹원의 '분사옹원'을 약칭한 것으로, 기록상으로도 흔히 '분원'이란 이름을 많이 썼으며 분주원이라 개칭되기도 했다. 사옹원에서 왕실용 어기번조를 맡아본 것은 고려 시대부터였으며 조선 태조 1년(1392)에 사선서를 설치했다가 이것을 사옹방으로, 그리고 세조 13년(1467) 사옹원으로 개칭해 조선말까지 존속했다. 여지도서 양근군조에 따르면 광주 번조소를 남종면으로 이설한 것은 영조 28년(1752)이었다고 하며, 매년 춘추로 사옹원 관원이 어용지기의 자기 제조를 감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옛날 분원에서 만든 분원사기는 백자, 염부와 유리유, 진사, 염부와 철사의 2채, 염부와 철사, 진사의 3채 등의 자기가 생산되었다. 도요지는 현재의 분원초등학교 중심부에 있었으며 지대가 높은 곳으로 갈수록 상질의 자기 파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고요일수록 고지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 분원에서 자기번조에 종사하던 사기장은 380명 정도였으며 이 장인들은 가지 제조를 위해 분원 주위에 별도의 촌락을 이루어 살았는데, 이에 딸린 권속과 기타 인구를 합치면 거의 1000명을 헤아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사옹원의 사기장 자손들은 다른 업종에 종사하지 않고 그 업을 세전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분원에서의 사기번조는 17세기 후반 들어 공장들의 생계를 약간 보조하는 의미에서 사번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고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여기에 상인 자본이 개입해 19세기에는 그 규모가 점차 증대, 고종 21년(1884년)에는 결국 상업자본가에 의해 민영화로 전환되었다.
이때 활동한 공인이 바로 지규식(池圭植)이다.
현재 분원백자자료관은 박물관 형태이며, 조선의 마지막 관요(왕실용 도자기를 구워내기 위하여 정부에서 관리했던 가마터)인 분원리 유적 위에 조성되었다.
지금의 분원리는 1973년 팔당댐의 건설로 수몰되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며, 현재의 분원 백자자료관은 2003년 폐교인 분원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 개관하였다. 자료관은 2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2층은 세미나실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1층에만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광주 가마터에서 출토된 조선백자와 조선시대 관영 사기의 변천과 도자기의 역사, 미니어처로 재현된 가마터의 모습과 생활 등이 전시되어 있다.
분원리에는 붕어찜 마을이라 할 만큼 붕어찜을 비롯한 민물 매운탕 맛집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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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복식당 (사진=김영복 연구가) |
원래 이 집은 양평 강하면에 있던 맛집이었다. 당시 이 집은 필자의 단골집으로 어떤 손님들 데리고 가 맛을 보여 주어도 맛없다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 집은 주말이나 공휴일이 아니더라도 점심에 가면 웨이팅이 보통 20분에서 30분 정도 걸린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좀 일찍 도착하여 기다림 없이 자리할 수가 있었다.
매장 안에 들어서니 강하면에 있을 때보다 매장이 넓어져 꽤 여유로워 보였다. 철판 불판 위에 고기, 아삭한 숙주, 파채, 버섯, 당면 등이 산더미처럼 수북이 쌓고 가장자리에 맛있는 육수를 부어 준다.
너무 달기만 한 인위적인 불고기 맛이 아니라 간이 딱 알맞게 떨어진 기분 좋은 맛이었다. 많이 달지 않아서 그런지 질리지 않고 계속 먹게 되는 맛이다. 불판 가장자리에 자작한 육수 그리고 잘 익은 고기를 야채랑 함께 먹으니 정말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아내나 사위 딸 모두 좋아하니 이곳을 선택한 필자도 꽤 기분이 좋다.
원래 이 집은 강하면에 있을 때 묵직한 무쇠솥에 밥을 해 주었다. 그렇지만 약간 달라지기는 했지만, 이 집 솥 밥은 어찌나 고슬고슬하고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지 밥만 먹어도 맛있다. 밥을 공기에 싹 덜어두고, 누룽지 숭늉 만들려고 물 부어놓은 다음 불고기와 함께 먹으니 잃었던 입맛조차 돌아오는 듯하다. 대복식당은 익숙했던 위치에서 자리를 옮겼지만 역시 본연의 맛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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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복식당 불고기 (사진=김영복 연구가) |
19세기 말엽에 간행된 『한불자뎐』, 『한영자뎐』에서도, 심지어는 1938년에 간행된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에서도 '불고기'란 표제어는 볼 수가 없다. '불고기'란 단어가 표제어로 제시된 첫 사전은 1950년에 편찬된 한글학회의 『큰사전』 제3권이었다. 불고기 [이] 숯불 옆에서 직접 구워 가면서 먹는 짐승의 고기라고 나와 있다.
조리서상에 불고기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1958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지낸 요리연구가 방신영(方信榮, 1890년~1977년)의 『고등요리실습』이다. 너비아니의 속칭으로 불고기를 규정하였다. 이 시기 국어사전에서 너비아니는 쇠고기를 얇게 저미어서 양념하여 구운 음식, 불고기는 구워서 먹는 짐승의 고기로 의미가 서로 다르게 규정됐다. 그 후 1967년 『한국요리』와 1970년 『가정요리』까지도 너비아니와 불고기를 동일하게 본 음식으로 추정할 수 있다. 비로소 불고기가 독립된 명칭으로 등장한 것은 1972년 『생활요리, 동양요리』였다. 이렇게 불고기가 늦게 등장한 이유는 불고기라는 단어가 너비아니의 속칭이며, 상스러운 이름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불고기가 완전히 대중화된 1972년이 되어서야 독립된 명칭으로 조리서에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짐승의 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일은 아득한 옛날부터 있어 온 일이다.
조선 후기 화가 성협(成夾 생몰연대 미상)이 그린 '야연(野宴)'이다. 들 야(野) 자에 잔치 연(宴) 자로, 들(집 밖)에서 잔치를 벌이는(고기를 구워 먹는) 장면을 그렸다. '연'은 '연회석 완비' 할 때의 그 연 자다.
그림에는 불판에 올린 고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숯불이 이글거리고 양념 그릇도 보인다. 막 나뭇가지를 잘라 만든 투박한 젓가락이 그림의 무대가 야외임을 말해준다.
세종은 소 도살 현장을 신고한 사람에게 포상하는 우금령(牛禁令)을 내렸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틈에서는 고기를 구웠다. 물론 조선 후기에는 이런 강제 조항도 유명무실해졌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정조 12년(1788) 10월 29일에 영의정 김치인이 아뢰기를, "그중 하나는, 연해 어전(魚箭)이 있는 마을에서 명절 때 당집에 바치기 위해 소를 잡으므로 많은 소들이 거의 다 없어졌기 때문에 돈이 부족한 자는 다시 소를 장만할 방법이 없으니 거듭 도축 금지(屠畜禁止)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의 도살을 금지하는 것을 연전의 행회(行會)에서 얼마나 엄격히 하였습니까. 더구나 본도에서 매매하는 물건 중에는 소가 대부분이고, 땅이 또 돌이 많고 메말라 다른 곳에 비해 소를 갑절이나 부려야 하는데, 도살 금지령이 싹 사라져 버렸으니 진실로 한심합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거듭 법금(法禁)을 엄히 밝혀 오래되어도 느슨해지는 일이 없게 하여 소가 번식되는 효과가 있게 하소서."
느슨해 진 우금령(牛禁令)을 다시 강화시키도록 왕에게 권한 것이다.
우금(牛禁)을 범한 사람에게는 벌금인 우속(牛贖) 즉 거두었다. 그러나 사대부들이나 선비들은 비록 벌금을 내는 경우가 되더라도 고기 맛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음력 10월이면 전골냄비에 소고기를 비롯한 여러 재료를 담고 육수를 부어 끓인 음식을 둘러앉아 먹던 풍속. 예전에는 숯불을 지핀 화로를 가운데에 놓고 번철을 올려 소고기에 기름, 간장, 파, 마늘, 고춧가루로 조미해 굽거나 볶아서 둘러앉아 먹었는데, 이를 난로회(煖爐會)라 하였다."
마치 우리 가족들이 불고기를 앞에 두니 옛 선비들의 난로회(煖爐會)가 생각이 난다.
예나 지금이나 포기할 수 없는 맛이 바로 불고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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